IX. 법들과 도덕규범들 (Laws and Morals)

법들과 도덕규범들 사이에는 여러 서로 다른 유형의 관계들이 있으며, 그 가운데 어떤 하나를 그들 사이의 관계로 따로 골라 연구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다. 오히려 법들과 도덕규범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단언이나 부정에 의해 의미될 수 있는 여러 서로 다른 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 단언되는 것은, 거의 누구도 부인한 적 없는 일종의 연결이다. 그러나 그 논박 불가능한 존재가 더 의심스러운 어떤 연결의 징후(sign)로 잘못 받아들여지거나, 심지어 그것과 혼동될 수 있다. 예컨대, 법의 발전이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특정 사회 집단들의 관행적 도덕(conventional morality)과 이상들(ideals), 그리고 당시 수용된 도덕을 넘어선 도덕적 지평을 가진 개인들이 제기한 계몽된 도덕적 비판의 형식들에 의해 실제로 깊이 영향을 받아 왔다는 점은 진지하게 다툴 수 없다. 그러나 이 진리를 부당하게 가져와 다른 명제의 근거로 삼을 수도 있다. 곧 법체계는 도덕이나 정의와 어떤 특정한 부합(specific conformity)을 반드시 드러내야 하거나, 그것에 복종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널리 퍼진 확신 위에 반드시 기초해야 한다는 명제이다. 또, 이 명제가 어떤 의미에서는 참일 수도 있다 하더라도, 법체계에서 사용되는 특정 법들의 법적 유효성 기준들이 명시적이지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도덕이나 정의에 대한 참조를 포함해야 한다는 점은 그로부터 따라 나오지 않는다.

이 밖에도 많은 다른 문제들이 법들과 도덕규범들의 관계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이 장에서는 그 가운데 두 가지만 논의할 것이다. 다만 두 문제 모두 다른 많은 문제들에 대한 일정한 고찰을 수반할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자연법(Natural Law)과 법실증주의(Legal Positivism) 사이의 쟁점으로 여전히 해명적으로(illuminatingly) 묘사될 수 있는 문제이다. 비록 이 두 명칭 각각이 법들과 도덕규범들에 관한 서로 다른 논제들의 범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게 되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법실증주의를, 법들이 도덕의 일정한 요구들을 재현하거나 충족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에서도 (p. 186) 필연적 진리는 아니라는 단순한 논지(contention)로 이해하겠다. 물론 실제로 법들이 그렇게 해 온 경우는 많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견해를 취한 사람들이 도덕의 성격에 관해 침묵했거나 서로 매우 달랐기 때문에, 법실증주의가 거부되어 온 두 가지 매우 다른 형식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자연법의 고전적 이론들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다. 곧 인간 이성에 의한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인간 행위의 일정한 원칙들이 있고, 인간이 만든 법(man-made law)이 유효하려면 그것들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도덕에 관해 다른, 덜 합리주의적인 견해를 취하며, 법적 유효성이 도덕적 가치와 연결되는 방식들에 대해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이 절과 다음 절에서는 이 가운데 첫 번째 것을 검토할 것이다.

플라톤(Plato)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이 행위해야 하는 방식들이 인간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있다는 명제의 단언(assertion)과 또한 그 부정(denial)에 바쳐진 방대한 문헌 속에서, 한쪽 논쟁자들은 다른 쪽 논쟁자들에게 “이것을 볼 수 없다면 당신들은 눈먼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하고, 그 대답으로 “당신들은 꿈을 꾸고 있었다”라는 말을 받을 뿐인 듯하다. 이는 옳은 행위의 참된 원칙들이 이성적으로 발견 가능하다는 주장이 보통 별개의 교설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원래는 무생물적 자연과 생물적 자연을 포괄하는 자연에 대한 일반적 구상(conception)의 일부로 제시되었고 오랫동안 그 일부로 방어되었기 때문이다. 이 전망(outlook)은 여러 방식에서 현대 세속적 사유의 틀을 구성하는 자연에 대한 일반적 구상과 반정립적이다. 따라서 비판자들에게 자연법 이론은 현대 사유가 승리적으로 벗어난 깊고 오래된 혼란들에서 생겨난 것처럼 보였고, 그 옹호자들에게 비판자들은 더 심원한 진리들을 무시한 채 피상적 사소함들만 고집하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많은 현대 비판자들은, 올바른 행위의 법들(laws of proper conduct)이 인간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있다는 주장이 ‘법(law)’이라는 단어의 단순한 애매성에 기초해 있으며, 이 애매성이 드러나면 자연법은 치명타를 입는다고 생각해 왔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법의 정신(Esprit des Lois)』 제1장에서, 별 같은 무생물들과 동물들이 ‘자기 자연의 법(law of their nature)’에 복종하는데 왜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고 죄에 빠지는지를 순진하게 묻는 몽테스키외(Montesquieu)를 다룬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밀은 이것이 (p. 187) 자연의 과정이나 반복적 일양성들을 정식화하는 법칙들과, 인간에게 특정한 방식들로 행위할 것을 요구하는 법들 사이의 오래된 혼동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전자는 관찰과 추론에 의해 발견될 수 있고 ‘기술적(descriptive)’이라고 불릴 수 있으며, 과학자의 일은 바로 그것들을 이렇게 발견하는 것이다. 후자는 그렇게 확립될 수 없다. 그것들은 사실들의 진술이나 기술이 아니라, 인간들이 특정한 방식들로 행위해야 한다는 ‘처방들(prescriptions)’ 또는 요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몽테스키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다. 처방적 법들(prescriptive laws)은 위반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법들로 남을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인간 존재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에 의해 발견된 자연법칙들에 관하여, 그것들이 위반될 수 있다거나 위반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별들이 자기들의 반복적으로 일양적인 운동을 기술한다고 표방하는 과학적 법칙들에 반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면, 이 법칙들은 위반되는 것이 아니라 ‘법칙들’이라고 불릴 자격을 잃고 다시 정식화되어야 한다. ‘법’의 의미에서 보이는 이러한 차이들에는, ‘must’, ‘bound to’, ‘ought’, ‘should’ 같은 관련 어휘들에서 보이는 체계적 차이들이 대응한다. 그러므로 이 관점에서 보면 자연법에 대한 믿음은 매우 단순한 오류, 곧 법의 의미가 스며든 이러한 단어들이 가질 수 있는 매우 다른 의미들을 지각하지 못한 데로 환원된다. 이는 마치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이 “당신은 병역을 위해 신고해야 한다(You are bound to report for military service)”와 “바람이 북쪽으로 돌면 얼 수밖에 없다(It is bound to freeze if the wind goes round to the north)”에서 그러한 단어들의 매우 다른 의미를 지각하지 못한 것과 같다.

자연법을 가장 격렬하게 공격한 벤담(Bentham)과 밀(Mill) 같은 비판자들은, 이러한 구별되는 법의 의미들 사이에서 상대방들이 보인 혼동을, 자연의 관찰된 반복적 일양성들이 우주의 신적 통치자(Divine Governor)에 의해 처방되거나 포고되었다는 믿음의 잔존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신정론적 관점에서는, 중력의 법칙과 십계명, 곧 인간을 위한 신의 법(God’s law for Man)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블랙스톤(Blackstone)이 단언했듯 비교적 사소한 것이었다. 창조된 것들 가운데 인간만이 이성과 자유의지를 부여받았고, 그래서 사물들과 달리 신적 처방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에 불복종할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자연법은 항상 우주의 신적 통치자나 입법자에 대한 믿음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설령 그렇게 결합되어 있었던 곳에서도 그 특징적 교의들(tenets)이 논리적으로 그 믿음에 의존했던 것은 아니다. 자연법 안으로 들어오는 ‘자연적(natural)’이라는 단어의 관련 의미와, 처방적 법들과 기술적 법칙들 사이의 차이, 곧 현대인의 마음에는 너무나 명백하고 중요한 그 차이를 (p. 188) 최소화하는 자연법의 일반적 전망은 모두 그리스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목적에서는 그 그리스 사상은 꽤 세속적이었다. 기실 어떤 형태의 자연법 교설이 계속 재단언되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 호소력이 신적 권위와 인간적 권위 양자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고, 또 이제는 받아들일 사람이 거의 없을 용어법과 많은 형이상학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도덕과 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몇 가지 기초적 진리들(elementary truths)을 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그 형이상학적 배경에서 풀어내어 여기에서 더 단순한 용어들로 다시 진술하고자 한다.

현대 세속적 사유에서 무생물과 생물, 동물과 인간의 세계는 일정한 반복적 일양성을 지닌 연결들을 예시하는 되풀이되는 종류의 사건들과 변화들의 장면이다. 이 가운데 적어도 일부를 인간 존재들은 발견하여 자연법칙들(laws of nature)로 정식화하였다. 이 현대적 견해에서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연의 어떤 부분에 이러한 반복적 일양성들에 대한 지식을 끌어다 적용하는 것이다. 물론 위대한 과학 이론들의 구조가 관찰 가능한 사실, 사건, 변화들을 어떤 단순한 방식으로 비추어 내는 것은 아니다. 기실 그러한 이론들의 큰 부분은 관찰 가능한 사실 안에 직접 대응물을 갖지 않는 추상적 수학 정식화들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것들이 관찰 가능한 사건들과 변화들에 연결되는 지점은, 이러한 추상 정식화들로부터 관찰 가능한 사건들을 실제로 참조하며, 그러한 사건들에 의해 확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일반화들이 연역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과학 이론이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킨다는 주장은 궁극적으로 무엇이 일어날지를 예측하는 그 이론의 능력에 의존하며, 이 능력은 반복적으로 일양적인 발생에 대한 일반화들에 기초한다. 중력의 법칙과 열역학 제2법칙은 현대 사유에서, 관찰 가능한 현상들의 반복적 일양성들에 관해 제공하는 정보 덕분에 자연법칙들이며 단순한 수학적 구성물 이상의 것이다.

자연법 교설은, 관찰 가능한 세계를 단지 그러한 반복적 일양성들의 장면으로 보지 않고 자연에 대한 지식을 단지 그것들에 대한 지식으로 보지도 않는 더 오래된 자연 구상의 일부이다. 오히려 이 더 오래된 전망에서는, 인간적인 것이든 생물적인 것이든 무생물적인 것이든 명명 가능한 모든 종류의 존재하는 사물이, 단지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지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p. 189) 그것에 고유한 선, 곧 그것에 적합한 목적(end)인 일정한 최적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자연이 그 자체 안에 사물들이 실현하는 탁월성의 수준들(levels of excellence)을 담고 있다는 목적론적 자연 구상(teleological conception of nature)이다. 어떤 주어진 종류의 사물이 그 고유하거나 적합한 목적에 이르기까지 나아가는 단계들은 반복적으로 일양적인 양상을 보이며, 그 사물의 특징적 변화, 작용, 또는 발전 양태를 기술하는 일반화들로 정식화될 수 있다. 그 정도까지 목적론적 자연관은 현대 사유와 중첩된다. 차이는 목적론적 관점에서는 사물들에게 닥치는 반복적으로 일양적인 사건들이 단지(merely) 반복적으로 일양적인 발생 양상으로만 생각되지 않고, 그것들이 실제로(do) 반복적으로 일양적인 발생 양상을 보이는지, 그것들이 일어나야 하는지(should), 또는 그것들이 일어나는 것이 좋은지(good)라는 질문들이 별개의 질문들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우연(chance)’에 귀속되는 몇몇 드문 기형들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관련 사물의 적합한 목적 또는 목표를 향한 한 단계로 제시됨으로써 설명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선한 것 또는 일어나야 할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한 사물의 발전 법칙들은 그것이 어떻게 마땅히 행위하거나 변화해야 하는지와 어떻게 실제로 반복적으로 일양적인 행태나 변화를 보이는지를 모두 보여주어야 한다.

자연에 관한 이러한 사고방식은 추상적으로 진술되면 낯설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에도 적어도 생물들에 관해서는 여전히 말하는 몇몇 방식들을 떠올리면 덜 기이하게 보일 수 있다. 목적론적 관점은 그 발전을 기술하는 일상적 방식들 속에 여전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도토리(acorn)의 경우, 참나무(oak)로 성장하는 것은 도토리들에게서 반복적으로 일양적인 성취로 나타나는 것일 뿐 아니라, (역시 반복적으로 일양적인) 부패(decay)와 달리 성숙의 최적 상태로 구별된다. 이 최적 상태에 비추어 중간 단계들은 설명되고 좋거나 나쁜 것으로 판단되며, 그것의 여러 부분들의 ‘기능들(functions)’과 구조적 변화들이 식별된다. ‘완전한(full)’ 또는 ‘적합한(proper)’ 발전에 필요한 수분을 얻으려면 잎의 정상적 성장이 요구되며, 이를 공급하는 것이 잎의 ‘기능’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성장을 ‘자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것(ought naturally to occur)’으로 사고하고 말한다. 무생물들의 작용이나 운동의 경우, 그것들이 인간 존재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설계한 인공물들이 아닌 한, 이러한 말하기 방식들은 훨씬 덜 그럴듯해 보인다. 돌이 땅에 떨어질 때 어떤 적합한 (p. 190) ‘목적(end)’을 실현하고 있거나, 말이 마구간으로 달려 돌아가듯 자기 ‘고유한 자리(proper place)’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관념은 이제 다소 우스꽝스럽다.

기실, 목적론적 자연관을 이해할 때의 난점 하나는, 그것이 반복적으로 일양적인 일어남에 대한 진술들과 일어나야 할 것에 대한 진술들 사이의 차이를 최소화하듯이, 현대 사유에서 그토록 중요한, 자기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with) 그것을 의식적으로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인간 존재들과 다른 생물 또는 무생물 사이의 차이도 최소화한다는 점이다.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다른 사물들처럼 그에게 설정된 특정한 최적 상태 또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생각되며, 그가 다른 사물들과 달리 이것을 의식적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와 나머지 자연 사이의 근본적 차이로 파악되지 않는다. 이러한 특정한 인간의 목적 또는 선은 부분적으로, 다른 생물들의 경우처럼, 생물학적 성숙과 발달된 신체적 능력들의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인간에게 특유한 요소로서, 사유와 행위에서 드러나는 정신과 품성의 발전 및 탁월성을 포함한다. 다른 사물들과 달리 인간은 추론과 성찰을 통해 이러한 정신과 품성의 탁월성을 달성하는 일이 무엇을 수반하는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욕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이 목적론적 견해에서는 이 최적 상태가 인간이 그것을 욕구하기 때문에 그의 선이나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이미 그의 자연적 목적이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욕구한다.

또한,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인간 존재들을 사고하고 말하는 몇몇 방식들 속에 살아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좋은(good) 인간의 필요들(needs)로 식별하고, 인간에게 행해지거나 인간이 겪는 어떤 것들을 해악(harm) 또는 손해(injury)로 식별하는 데 잠재해 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이 죽고 싶어서 먹거나 쉬기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이지만, 우리는 먹고 쉬는 것을 인간들의 반복적으로 일양적인 행위들이거나 그저 우연히 욕구하는 일들 이상의 것으로 생각한다. 음식과 휴식은, 어떤 사람들이 그것들이 필요할 때 그것들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필요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인간이 먹고 자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할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때때로 먹고 쉬어야 한다거나, 이러한 일들을 하는 것은 자연적으로 좋다고도 말한다. 인간 행위에 대한 그러한 판단들에서 ‘자연적으로(naturally)’라는 말의 힘은, 그 판단들을 단순한 관행들이나 인간적 처방들을 반영하는 판단들(‘모자를 벗어야 한다’)과 구별하고, 그 내용이 (p. 191) 사유나 성찰에 의해 발견될 수 없는 판단들과 구별하며, 또한 특정 시점에 한 사람은 우연히 가지고 다른 사람은 가지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을 단지 지목하는 판단들과도 구별하는 데 있다. 같은 전망은 신체 기관들의 기능들(functions)에 대한 우리의 구상과, 이것들과 단순한 인과적 속성들 사이에 우리가 긋는 선에도 나타난다. 우리는 피를 순환시키는 것이 심장의 기능이라고 말하지만,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 암성 종양(cancerous growth)의 기능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 행위에 대한 일상적 사고 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목적론적 요소들을 예시하기 위해 고안된 이 투박한 사례들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는 생물학적 사실이라는 낮은 영역에서 끌어온 것이다. 이 사고와 표현의 양식을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자명한 어떤 것이라고 정당하게 지적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 활동의 적합한 목적이 생존(survival)이라는 묵시적 가정(tacit assumption)이고, 이는 대부분의 인간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계속 존재하기를 바란다는 단순한 우연적 사실에 기초해 있다. 우리가 자연적으로 행하기에 좋은 것들이라고 말하는 행위들은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행위들이며, 인간의 필요, 해악, 그리고 신체 기관들이나 변화들의 기능(function)이라는 관념들도 같은 단순한 사실에 기초해 있다. 물론 여기서 멈춘다면 우리는 자연법의 매우 약화된 판본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전망의 고전적 주창자들은 생존(perseverare in esse suo)을 인간의 목적 또는 인간에게 좋은 것에 대한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다툴 여지가 큰 개념에서 단지 가장 낮은 층위로만 파악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안에 인간 지성의 사심 없는 함양(disinterested cultivation)을 포함시켰고, 아퀴나스는 신에 대한 앎을 포함시켰으며, 이 둘은 도전될 수 있고 실제로 도전되어 온 가치들을 대표한다. 그러나 홉스(Hobbes)와 흄(Hume)을 포함한 다른 사상가들은 기꺼이 눈높이를 낮추었다. 그들은 생존이라는 소박한 목적에서 자연법 용어법에 경험적 일리(empirical good sense)를 부여하는, 중심적이고 다툴 수 없는 요소를 보았다. “인간 본성은 어떤 수단으로도 개인들의 결합(association)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그리고 형평(equity)과 정의의 법들(laws)에 아무런 고려도 기울여지지 않는다면 그 결합은 결코 자리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1

이 단순한 생각은 실제로 법들과 도덕규범들 양자의 특징들과 매우 깊은 관련을 가지며, 인간의 목적 또는 인간에게 좋은 것이, 사실상 사람들이 깊이 의견불일치를 보일 수 있는 특정한 삶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일반적 목적론적 전망의 더 다툴 수 있는 부분들로부터 풀어낼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생존을 언급하면서, 이것이 인간의 고유한 목표 또는 목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필연적으로 욕구하는, 선행적으로 고정된 어떤 것이라는 관념을 현대인의 마음에는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버릴 수 있다. 대신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살기를 욕구한다는 것은 달리 그럴 수도 있었던 단순한 우연적 사실이며, 생존을 인간의 목표 또는 목적이라고 부를 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인간들이 그것을 욕구한다는 것 이상이 아닐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상식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더라도, 생존은 여전히 인간 행위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서 특수한 지위를 가지며, 이는 자연법의 정통적 정식화들에서 생존에 부여된 두드러짐과 필연성에 평행한다. 압도적 다수의 인간들이 끔찍한 비참함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살기를 바란다는 점만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가 세계와 서로를 기술하는 데 쓰는 우리의 사고와 언어 전체 구조들 속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고자 하는 일반적 바람을 빼내면서도 위험과 안전, 해악과 이익, 필요와 기능, 질병과 치료 같은 개념들을 온전하게 남겨 둘 수 없다. 이것들은 목적으로 받아들여진 생존에 대해 그것들이 하는 기여를 참조하여 사물들을 동시에 기술하고 평가하는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단순하고 덜 철학적인 고려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인간의 법과 도덕규범들에 관한 논의와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의미에서 생존을 하나의 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논의의 용어들에 의해 전제되는 것으로서 그것에 이미 묶여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자살 클럽의 장치들이 아니라 계속 존재를 위한 사회적 장치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장치들 가운데 이성에 의해 발견 가능한 자연법들(natural laws)로 유익하게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인간의 법과 도덕에 대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알고 싶다. 인간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이 질문이나 다른 어떤 질문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말해 그들의 목적이 사는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논증은 단순하다. 인간 본성과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에 관한 몇몇 매우 명백한 일반화들, 기실 자명한 이치들(truisms)에 대한 성찰은, (p. 193) 이것들이 타당하게 유지되는 한, 어떤 사회 조직이 존속 가능하려면 반드시 담고 있어야 하는 일정한 행위 규칙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규칙들은 실제로, 사회 통제의 서로 다른 형식들로 구별되는 지점까지 발전한 모든 사회들의 법과 관행적 도덕 안에서 공통 요소를 이룬다. 그것들과 함께, 법과 도덕규범들 양자에는 특정 사회에 고유한 많은 것과 임의적이거나 단순한 선택의 문제로 보일 수 있는 많은 것이 발견된다. 인간 존재들, 그들의 자연적 환경, 그리고 목적들에 관한 기초적 진리들(elementary truths)에 기초를 둔, 보편적으로 인정된 이러한 행위 원칙들은 그 이름 아래 자주 제시되어 온 더 장대한, 그리고 더 다툴 수 있는 구성물들과 대비하여 자연법의 최소한의 내용(minimum content)으로 여겨질 수 있다. 다음 절에서는 이 소박하지만 중요한 최소한이 의존하는 인간 본성의 두드러진 특징들을 다섯 가지 자명한 이치들의 형식으로 검토할 것이다.

2. 자연법의 최소한의 내용 (The Minimum Content of Natural Law)

여기서 제시하는 단순한 자명한 이치들(truisms)과 그것들이 법 및 도덕규범들과 맺는 연결을 고찰할 때, 각 경우에 언급된 사실들이 생존이 하나의 목적으로 주어지면 법과 도덕규범들이 특정한 내용을 포함해야 하는 이유(reason)를 제공한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논증의 일반 형식은 단순하다. 그러한 내용이 없다면 법들과 도덕규범들은 인간들이 서로 결합하면서 가지는 생존이라는 최소 목적을 증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없으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들은 어떤 규칙들에도 자발적으로 복종할 이유를 갖지 않을 것이다. 또 규칙들에 복종하고 그것들을 유지하는 것이 자기 이익에 부합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최소한의 협력이 없다면, 자발적으로 부합하지 않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강제(coercion)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 접근에서 자연적 사실들과 법적·도덕적 규칙들의 내용 사이의 구별되게 합리적인 연결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연적 사실들과 법적 또는 도덕적 규칙들 사이의 전혀 다른 연결 형식들을 탐구하는 것도 가능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직 젊은 과학들인 심리학과 사회학은, 일정한 물리적·심리적·경제적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예컨대 어린 아이들이 (p. 194) 가족 안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먹여지고 양육되지 않으면, 어떤 법들의 체계나 도덕규범들의 규약도 확립될 수 없다는 점, 또는 특정한 유형에 부합하는 법들만 성공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도 있고 이미 발견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종류의 자연적 조건들과 규칙 체계들 사이의 연결들은 이유들(reasons)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일정한 규칙들의 존재를, 그 규칙들을 자기 규칙으로 삼는 사람들의 의식적 목표들이나 목적에 관련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유아기에 일정한 방식으로 먹여지는 것이 어떤 인구 집단이 도덕 규약이나 법 규약을 발전시키거나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 또는 심지어 원인(cause)임이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니다. 이러한 인과적 연결들은 물론 목적들이나 의식적 목표들에 기초한 연결들과 충돌하지 않는다. 기실 그것들은 자연법이 자기 출발점들로 삼는 의식적 목표들이나 목적들을 인간 존재들이 왜 가지는지를 설명할 수도 있으므로, 후자보다 더 중요하거나 근본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인과적 설명들은 자명한 이치들에 기초하지 않고, 의식적 목표들이나 목적들에 의해 매개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다른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사회학이나 심리학이 관찰에, 그리고 가능한 경우 실험에, 기초한 일반화와 이론의 방법들로 확립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연결들은 일정한 법적·도덕적 규칙들의 내용을 다음 자명한 이치들에서 진술되는 사실들에 관련시키는 연결들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i) 인간의 취약성 (Human vulnerability) 법과 도덕의 공통 요구들은 대부분 제공되어야 할 적극적 봉사들이 아니라 자제들(forbearances)로 이루어지며, 이 자제들은 보통 금지들(prohibitions)이라는 부정적 형식으로 정식화된다. 그 가운데 사회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살해하거나 신체적 해악을 가하는 데 폭력을 사용하는 일을 제한하는 규칙들이다. 그러한 규칙들의 기본적 성격은 하나의 질문으로 드러낼 수 있다. 이런 규칙들이 없다면 우리와 같은 존재들에게 다른 어떤 종류의 규칙들을 가진다는 데 무슨 의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수사적 질문의 힘은 인간들이 때때로 신체적 공격을 하는 경향이 있고, 보통은 신체적 공격에 취약하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명한 이치(truism)이기는 하지만 필연적 진리는 아니다. 사태는 달랐을 수도 있고 언젠가는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체 구조(외골격이나 등딱지를 포함)가 같은 종의 다른 구성원들의 공격에 사실상 면역이 되게 하는 동물 종들도 있고, 공격할 수 있게 하는 기관을 전혀 갖지 않은 동물들도 있다. 인간들이 (p. 195) 서로에 대한 취약성을 잃는다면, 법과 도덕규범들의 가장 특징적인 규정 가운데 하나인 살해하지 말라(Thou shalt not kill)에 대한 한 가지 명백한 이유도 사라질 것이다.

(ii) 근사적 동등성 (Approximate equality) 인간들은 신체적 힘, 민첩성, 그리고 훨씬 더 크게는 지적 능력에서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도덕의 서로 다른 형식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대한 중요성을 가지는 사실은, 어떤 개인도 협력 없이 짧은 기간을 넘어 타인들을 지배하거나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가장 강한 사람도 때로는 잠을 자야 하며, 잠든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자기 우월성을 잃는다. 이 근사적 동등성의 사실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법적 의무와 도덕적 의무 양자의 기초인 상호 자제와 타협의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만든다. 그러한 자제들을 요구하는 규칙들을 가진 사회생활은 때때로 성가시다. 그러나 이렇게 근사적으로 동등한 존재들에게 그것은 어쨌든 억제되지 않은 공격보다 덜 험악하고, 덜 야수적이며, 덜 짧다. 물론 이와 전적으로 양립하며 그와 동등하게 자명한 이치는, 그러한 자제 체계가 확립되면 언제나 그 보호 안에서 살면서 동시에 그 제약들(restrictions)을 깨뜨림으로써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기실 뒤에서 보이듯, 단순히 도덕적인 통제에서 조직화된 법적 통제 형식들로 나아가는 단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자연적 사실들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사태는 달랐을 수도 있다. 근사적으로 동등한 대신,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압도적으로 더 강하고 휴식 없이 지낼 수 있는 능력도 더 컸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이 이런 점들에서 현재 평균보다 훨씬 높았거나, 대부분이 그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한 예외적 인간들은 공격으로 얻을 것이 많고 타인들과의 상호 자제나 타협에서 얻을 것은 적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근사적 동등성이라는 사실의 중대한 중요성을 보기 위해 소인들 사이의 거인이라는 공상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그 중요성은 국가들 사이에 힘과 취약성에서 거대한 격차들이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국제 생활의 사실들에 의해 더 잘 예시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국제법의 단위들 사이의 이러한 불평등은 국제법에 국내법과 그토록 다른 성격을 부여하고, 그것이 조직화된 강제 체계로 작동할 수 있는 정도를 제한해 온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p. 196)

(iii) 제한된 이타성 (Limited altruism) 인간들은 서로를 절멸시키려는 바람에 지배되는 악마들이 아니며, 생존이라는 소박한 목적만 주어져도 법과 도덕규범들의 기본 규칙들이 필요하다는 입증을, 인간들이 주로 이기적이고 동료들의 생존과 복지에 사심 없는 관심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거짓 견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인간들이 악마들이 아니라면 천사들도 아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이 두 극단 사이의 중간이라는 사실은 상호 자제들의 체계를 필요하게도 하고 가능하게도 하는 것이다. 타인들을 해하려는 유혹을 전혀 받지 않는 천사들에게는 자제들을 요구하는 규칙들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드는 비용을 무모하게 무시하면서 파괴할 준비가 된 악마들에게는 그러한 규칙들이 불가능할 것이다. 사태가 현재 그러한 대로, 인간의 이타성은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간헐적이며, 공격 성향들은 통제되지 않으면 사회생활에 치명적일 만큼 충분히 빈번하다.

(iv) 제한된 자원 (Limited resources) 인간 존재들이 음식, 의복, 거처를 필요로 한다는 것, 이것들이 손 가까이에 무한히 풍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들이 부족하며 자연에서 재배되거나 얻어져야 하거나 인간의 수고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은 단지 우연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들만으로도 재산 제도의 어떤 최소 형식(반드시 개인 재산일 필요는 없지만)과 그것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독특한 종류의 규칙은 필수적이 된다. 재산의 가장 단순한 형식들은 일반적으로 ‘소유자’(owner) 이외의 사람들을 토지에 들어가거나 토지를 사용하는 것에서, 또는 물질적 사물들을 취하거나 사용하는 것에서 배제하는 규칙들에서 볼 수 있다. 작물이 자라려면 토지는 무차별적 출입으로부터 안전해야 하고, 식량은 그 재배 또는 포획과 소비 사이의 기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안전해야 한다.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삶 자체는 이러한 최소한의 자제들에 의존한다. 또한 이 점에서도 사태는 현재와 달랐을 수 있다. 인간 유기체가 식물들처럼 구성되어 공기에서 음식을 추출할 수 있었을 수도 있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경작 없이 무한히 풍부하게 자랐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규칙들은, 그것들이 부과하는 의무들과 이러한 의무들의 귀속양상이 개인들에 의해 변경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정태적 규칙들(static rules)이다. 그러나 아주 작은 집단들을 제외한 모든 집단이 적절한 공급을 얻기 위해 발전시켜야 하는 노동 분업은, 개인들이 의무들을 창출하고 그 귀속양상을 변경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에서 (p. 197) 동태적인 규칙들(dynamic rules)에 대한 필요를 가져온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자기 생산물을 이전하거나, 교환하거나, 판매할 수 있게 하는 규칙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거래들은 재산의 가장 단순한 형식을 규정하는 최초의 권리들과 의무들의 귀속양상을 변경할 행위능력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피할 수 없는 노동 분업과 항구적인 협력 필요 역시, 다른 형식들의 동태적 또는 의무-창출 규칙을 사회생활에서 필요하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이것들은 약속들을 의무의 원천(source of obligation)으로 인정하게 한다. 이 장치에 의해 개인들은 구두든 서면이든 말로써,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들로 행위하지 못한 데 대해 스스로 비난이나 처벌의 책임을 질 수 있게 된다. 이타성이 무제한적이지 않은 곳에서는, 타인들의 미래 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 형식을 창출하고 협력에 필요한 예측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러한 자기구속 작용들을 마련하는 항구적 절차가 요구된다. 이것은 교환되거나 공동으로 계획되는 것이 상호 서비스들인 곳, 또는 교환되거나 판매될 재화들이 동시에 또는 즉시 이용 가능하지 않은 곳에서 가장 명백하게 필요하다.

(v) 제한된 이해력과 의지력 (Limited understanding and strength of will) 사람들, 재산, 약속을 존중하는 규칙들이 사회생활에서 필요하게 되는 사실들은 단순하며, 그 상호 이익들은 명백하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것들을 볼 수 있고, 그러한 규칙들에 대한 부합이 요구하는 즉각적인 단기 이익들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 그들은 기실 다양한 동기들에서 복종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그 희생들이 얻는 이익에 비추어 치를 만하다는 신중한 계산에서, 어떤 이들은 타인들의 복지에 대한 사심 없는 관심에서, 어떤 이들은 그 규칙들 자체를 존중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들에 대한 헌신에서 자기 이상들을 찾기 때문에 복종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장기적 이익에 대한 이해도, 복종을 향한 이러한 서로 다른 동기들의 실효성이 의존하는 의지의 힘이나 선함도 모든 인간들에게 똑같이 공유되어 있지는 않다. 누구나 때로 자기 자신의 즉각적 이익을 선호하려는 유혹을 받으며, 이를 탐지하고 처벌하기 위한 특수 조직이 없다면 많은 이들이 그 유혹에 굴복할 것이다. 상호 자제의 이점들이 매우 명백하므로, (p. 198) 강제 체계에서 자발적으로 협력할 사람들의 수와 힘은 보통 악행자들(malefactors)의 그럴 법한 어떤 결합보다 클 것이다. 그럼에도 매우 작고 긴밀하게 결속된 사회들을 제외하면, 그때 그 체계의 이점들은 얻으려 하면서 그 의무들에는 복종하지 않으려 할 자들을 강제할 조직이 없다면, 제한들의 체계에 대한 복종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따라서 ‘제재들’(sanctions)은 복종의 통상적 동기로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복종하려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희생되지 않으리라는 보증(guarantee)으로 요구된다. 이것 없이 복종하는 것은 밀려나 무너질 위험을 감수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항구적 위험이 주어질 때, 이성이 요구하는 것은 강제적 체계 안에서의 자발적 협력이다.

인간들 사이의 근사적 동등성이라는 바로 그 자연적 사실이 조직화된 제재들의 실효성에서도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어떤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보다 엄청나게 더 강력해서 타인들의 자제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악행자들의 힘은 법과 질서의 지지자들의 힘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러한 불평등들이 주어지면, 제재들의 사용은 성공할 수 없고 그것들이 억누르도록 고안된 위험들만큼이나 큰 위험들을 수반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회생활이 소수의 악행자들에게만 간헐적으로 힘이 사용되는 상호 자제들의 체계에 기초하는 대신, 약자들이 자신들이 얻어낼 수 있는 최선의 조건으로 강자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의 ‘보호’ 아래 사는 체계만이 존속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자원의 희소성 때문에 서로 충돌하는 다수의 권력 중심들을 낳을 것이고, 각각은 자기 ‘강한 자(strong man)’를 중심으로 묶일 것이다. 이들은 간헐적으로 서로 전쟁을 벌일 수 있겠지만, 패배 위험이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자연적 제재가 불안한 평화를 보장할 수도 있다. 그때 ‘세력들(powers)’이 싸우기를 원치 않는 쟁점들을 규율하기 위한 일종의 규칙들이 수용될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근사적 동등성의 단순한 역학(logistics)과 그것의 법에 대한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소인들과 거인들을 공상할 필요가 없다. 관련 단위들이 힘에서 엄청나게 달랐던 국제 장면은 충분한 예시를 제공한다. 수 세기 동안 국가들 사이의 격차들은 조직화된 제재들이 불가능한 체계를 낳았고, 법은 ‘중대한(vital)’ 쟁점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안들에 국한되었다. (p. 199) 원자무기가 모든 이들에게 이용 가능해질 때, 그것이 불균등한 힘의 균형을 얼마나 시정하고 국내 형사법을 더 가깝게 닮은 통제 형식들을 가져올지는 지켜봐야 한다.

우리가 논의한 단순한 자명한 이치들은 자연법 교설 안의 건전한 양식의 핵심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법과 도덕규범들을 이해하는 데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또한 그것들은 이 기본 형식들의 정의를 어떤 특정 내용이나 사회적 필요들에 대한 참조 없이 순수하게 형식적 용어들로 내리는 일이 왜 그토록 부적절한 것으로 드러났는지도 설명한다. 아마 이 전망이 법리학(jurisprudence)에 주는 주요 이익은, 법의 특징들에 대한 논의를 자주 흐리는 일정한 오도적 이분법들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점이다. 예컨대 모든 법체계가 반드시 제재들을 마련해야 하는가라는 전통적 질문은, 이 단순한 자연법 판본이 제시하는 사물들에 대한 시야를 확보할 때 새롭고 더 명료한 빛 속에 놓일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흔히 망라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두 부적절한 대안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것이 ‘법’ 또는 ‘법체계’라는 단어들의 ‘그(the)’ 의미에 의해 요구된다고 말하는 대안과, 다른 한편으로 대부분의 법체계들이 제재들을 마련한다는 것은 ‘단지 사실(just a fact)’이라고 말하는 대안이다. 이 대안들 가운데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 중앙적으로 조직된 제재들이 없는 체계들에 ‘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확립된 원칙들은 없으며, 그러한 제재들을 갖지 않는 어떤 체계에 ‘국제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좋은 이유는 있다(강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한편, 인간들이 구성되어 있는 그대로의 존재들에게 최소 목적들을 수행하려면, 국내 체계 안에서 제재들이 가져야 하는 자리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자연적 사실들과 목적들의 배경이 주어지고, 이 배경이 국내 체계에서 제재들을 가능하고 필요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이것이 자연적 필연성(natural necessity)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유사한 어떤 문구는 사람들, 재산, 약속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 형식들, 곧 마찬가지로 국내법의 필수불가결한 특징들의 지위를 전달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우리는 ‘법은 어떤 내용도 가질 수 있다’는 실증주의 테제에 바로 이러한 형식으로 답해야 한다. 법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사회 제도들을 적절하게 기술하기 위해서는, 정의들(definitions)과 통상적 사실 진술들 옆에 제3 범주의 진술들을 위한 자리가 남겨져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p. 200) 곧 그것들의 참이 인간 존재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자신들이 가진 두드러진 특징들을 계속 유지한다는 데 의존하는 진술들이다.

3. 법적 유효성과 도덕적 가치

법과 도덕규범들 양자의 배후에 놓인 상호 자제들의 체계가 제공하는 보호들과 혜택들은, 서로 다른 사회들에서 매우 다른 범위의 사람들에게 확장될 수 있다. 대응하는 제약들(restrictions)을 수용할 의사가 있는 어떤 인간 부류에게도 이러한 기초적 보호들(elementary protections)을 부정하는 것은, 모든 현대 국가들이 적어도 말뿐인 경의(lip-service)를 바치는 도덕과 정의의 원칙들에 어긋난다는 점은 참이다. 그들이 공언하는 도덕 전망은 일반적으로, 적어도 이러한 근본 사항들에서는 인간 존재들이 같게 대우받을 자격이 있으며, 대우의 차이는 단지 타인들의 이익에 호소하는 것 이상의 정당화를 필요로 한다는 구상으로 배어 있다.

그러나 사회들의 법이나 수용된 도덕이 그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최소 보호들과 혜택들을 확장할 필요는 없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점은 분명하다. 노예소유 사회들에서 지배 집단은 노예들이 사용될 단순한 물건들이 아니라 인간 존재들이라는 감각을 잃을 수 있고, 그러면서도 서로의 청구들과 이익들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가장 민감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에서 증기선 보일러 폭발로 누군가 다쳤는지 질문을 받자 허크는 “아뇨, 깜둥이 하나가 죽었어요(No’m: killed a nigger)”라고 답했다. 샐리 이모의 말, “그럼 다행이네. 가끔은 사람이 다치기도 하니까(Well it’s lucky because sometimes people do get hurt)”는 인간들 사이에서 자주 지배적이었던 하나의 전체 도덕을 압축한다. 그것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허크가 대가를 치르며 알게 되었듯이, 지배 집단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러운 타인들에 대한 관심을 노예들에게 확장하는 일이 중대한 도덕적 위반행위(offence)로 여겨질 수 있으며, 도덕적 죄책의 모든 후속 귀결들을 가져올 수 있다. 나치 독일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시간상 우리에게 불쾌할 만큼 가까운 유사 사례들을 제공한다.

어떤 사회들의 법이 때때로 수용된 도덕보다 앞서 간 적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 법은 도덕을 따르며 노예의 살해조차 공적 자원의 낭비나, 그 노예가 재산으로 속한 주인에 대한 침해(offence)로만 간주될 수 있다.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곳에서도, 인종, 피부색, (p. 201) 또는 신조를 근거로 한 차별들은 모든 인간이 타인들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법체계와 사회적 도덕을 산출할 수 있다.

인간 역사의 이러한 고통스러운 사실들은, 어떤 사회가 존속 가능하려면 그 구성원들 가운데 일부에게 상호 자제들의 체계를 제공해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모두에게 제공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이미 제재들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논하면서 강조했듯이, 어떤 규칙 체계가 누군가에게 힘으로 부과되려면, 그것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자발적 협력이 없다면, 그렇게 권위(authority)를 창출하지 않는다면, 법과 정부의 강제 권력(coercive power)은 정립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권위의 기초 위에 정립된 강제 권력은 두 가지 주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은 규칙들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이기적으로 그 규칙들을 깨뜨리는 악행자들에 대해서만 행사될 수 있다. 다른 한편 그것은 종속 집단(subject group)을 제압하고 영구적 열등성의 지위에 유지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그 집단의 크기는, 지배 집단이 이용할 수 있는 강제 수단, 결속, 규율과 종속 집단의 무력함 또는 조직할 수 없음에 따라 지배 집단에 비해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이렇게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그 체계 안에는 그들의 충성을 불러일으킬 것이 아무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들만 있을 수 있다. 그들은 그 체계의 수익자들이 아니라 희생자들이다.

이 책의 앞선 장들에서 우리는 법체계의 존재가 언제나 두 측면을 제시하는 사회 현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현실적이려면 그 두 측면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규칙들의 자발적 수용에 관련된 태도들과 행위를 포함하며, 단순한 복종이나 묵인에 관련된 더 단순한 태도들과 행위도 포함한다.

따라서 법을 가진 사회는, 그 규칙들을 단지 불복종하면 공무담당자들의 손에서 자신들에게 닥칠 일을 알려 주는 신뢰할 만한 예측들로만 보지 않고, 내부 관점에서 수용된 행위 기준들로 보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악행자들이거나 그 체계의 무력한 희생자들일 뿐이기 때문에 이러한 법적 기준들이 힘이나 힘의 위협에 의해 부과되어야 하는 사람들도 포함한다. 그들에게 규칙들은 가능한 처벌의 원천일 뿐이다. 이 두 구성요소 사이의 균형은 (p. 202) 많은 서로 다른 요인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 체계가 공정하고, 그것이 복종을 요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중대한 이익들을 진정으로 돌본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의 충성을 얻고 유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안정적일 것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지배 집단의 이익 속에서 운영되는 좁고 배타적인 체계일 수 있으며, 잠재적 격변의 위협과 함께 계속 더 억압적이고 불안정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법에 대한 이러한 태도들의 다양한 결합들이 발견되며, 흔히 같은 개인 안에서도 그러하다.

이 사물들의 측면에 대한 성찰은 냉정한 진실 하나를 드러낸다. 의무의 일차 규칙들(primary rules of obligation)이 사회 통제의 유일한 수단인 단순한 사회 형식에서, 중앙적으로 조직된 입법부, 법원들, 공무담당자들, 제재들을 가진 법의 세계로 나아가는 단계는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실질적 이득들을 가져온다. 그 이득들은 변화에 대한 적응성, 확실성, 효율성이며, 이것들은 막대하다. 그 대가는 중앙적으로 조직된 권력이, 그 지지 없이도 될 수 있는 다수의 억압에 사용될 위험이다. 이는 의무의 일차 규칙들의 더 단순한 체제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방식이다. 이 위험이 현실화되었고 다시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연법의 최소한의 내용으로 제시한 것을 넘어 법이 도덕규범들에 반드시 부합해야 하는 어떤 추가적 방식이 있다는 주장(claim)은 매우 신중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단언들(assertions) 가운데 다수는 법과 도덕규범들 사이의 연결이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이라고 주장되는지를 명료하게 만들지 못하거나, 검토해 보면 참이고 중요한 어떤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을 법과 도덕규범들 사이의 필연적 연결로 제시하는 것은 대단히 혼란스럽다는 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 주장의 여섯 형식을 검토하면서 이 장을 마칠 것이다.

(i) 권력과 권위 (Power and authority) 법체계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단순한 권력에 기초하지도 않고 기초할 수도 없으므로, 도덕적 의무의 감각이나 그 체계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확신에 기초해야 한다고 자주 말해진다. 우리는 이 책의 앞선 장들에서, 위협으로 뒷받침된 명령들과 복종의 습관들은 법체계의 토대들과 법적 유효성이라는 관념을 이해하기에 부적절하다는 점을 스스로 강조했다. 이것들은 우리가 제VI장에서 길게 논변했듯이 그 해명을 위해 수용된 승인 규칙이라는 관념(notion)을 요구할 뿐 아니라, (p. 203) 이 장에서 보았듯이 강제 권력(coercive power)의 존재에 필요한 조건은 적어도 일부가 그 체계 안에서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그 규칙들을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법의 강제 권력이 그 수용된 권위를 전제한다는 말은 참이다. 그러나 ‘단지 권력에 기초한 법’과 ‘도덕적으로 구속적인 것으로 수용된 법’의 이분법은 망라적이지 않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들이 도덕적으로 구속적이라고 보지 않는 법들에 의해 강제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체계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이 그렇게 하도록 도덕적으로 구속되어 있다고 파악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렇게 파악할 때 그 체계는 가장 안정적일 것이다. 사실 그들을 체계에 묶어 두는 것은 많은 서로 다른 고려들에 기초할 수 있다. 장기적 이익 계산, 타인들에 대한 사심 없는 관심, 반성 없는 상속되거나 전통적인 태도, 또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려는 바람이 그것이다. 기실 그 체계의 권위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자기 양심을 검토하고, 도덕적으로는 그것을 수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하면서도 여러 이유로 계속 그것을 수용할 수 있다.

이러한 상식적 사항들(commonplaces)은 인간들이 인정하는 법적 의무와 도덕적 의무 양자를 표현하기 위해 동일한 어휘가 일반적으로 사용된다는 점 때문에 가려졌을 수 있다. 법체계의 권위를 수용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내부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 요구들에 대한 자기 감각을 법과 도덕규범들 양자에 공통적인 규범적 언어로 표현된 내부 진술들로 나타낸다. “나는(너는) 해야 한다”, “나는(그는) 해야만 한다”, “나는(그들은) 의무를 가진다.” 그러나 그들은 그로써 법이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도덕적 판단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더 말해지는 것이 없다면, 이런 방식으로 자기 또는 타인의 법적 의무들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것들을 이행하는 데 반대하는 도덕적 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추정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의무적인 것으로 수용되지 않는 한 법적으로 의무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언급한 추정은, 화자가 그 이행에 반대하여 제기할 도덕적 또는 다른 확정적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면, 법적 의무를 인정하거나 지적하는 일이 흔히 무의미할 것이라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ii) 도덕이 법에 미치는 영향 (The influence of morality on law) 모든 현대 국가의 법은 (p. 204) 수많은 지점에서 수용된 사회적 도덕과 더 넓은 도덕적 이상들 양자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향들은 입법을 통해 갑작스럽고 공공연하게 법 안으로 들어오거나, 사법 절차를 통해 조용하고 단편적으로 들어온다. 미국에서처럼 어떤 체계들에서는 법적 유효성의 궁극적 기준들이 정의의 원칙들이나 실체적 도덕 가치들(substantive moral values)을 명시적으로 편입한다. 영국에서처럼 최고 입법부의 권능에 형식적 제약들(restrictions)이 없는 다른 체계들에서도, 그 입법은 그럼에도 정의나 도덕에 마찬가지로 세심하게 부합할 수 있다. 법이 도덕을 비추는 추가 방식들은 무수하며,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다. 제정법들(statutes)은 단순한 법적 껍데기일 수 있고, 그 명시적 문언으로 도덕 원칙들의 도움을 받아 채워질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집행 가능한 계약들의 범위는 도덕과 공정성의 구상들을 참조하여 제한될 수 있다. 민사 및 형사상 그른 행위들(wrongs) 양자에 대한 책임은 도덕적 책임에 관한 지배적 견해들에 맞추어 조정될 수 있다. 어떤 ‘실증주의자’도 이것들이 사실이라는 점이나, 법체계들의 안정성이 도덕규범들과의 그러한 대응 유형들에 부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이 법과 도덕규범들의 필연적 연결이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존재는 인정되어야 한다.

(iii) 해석 (Interpretation) 법들은 구체적 사례들에 적용되려면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법 절차들의 성격을 흐리는 신화들이 현실주의적 연구에 의해 걷히고 나면, 제VII장에서 보았듯 법의 개방적 직조가 어떤 이들이 입법적이라고 부르는 창조적 활동을 위한 광대한 장을 남긴다는 점은 명백하다. 제정법들이나 선례들을 해석할 때 판사들은 맹목적이고 자의적인 선택과, 사전에 확정된 의미를 가진 규칙들로부터의 ‘기계적’ 연역이라는 대안들에 갇혀 있지 않다. 매우 자주 그들의 선택은, 그들이 해석하는 규칙들의 목적이 합리적이라는 가정에 의해 이끌린다. 따라서 그 규칙들은 부정의를 낳거나 확립된 도덕 원칙들을 위반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다. 사법적 결정은, 특히 고도의 헌법적 중요성을 가진 사안들에서, 단순히 어떤 하나의 두드러진 도덕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 가치들 사이의 선택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법의 의미가 의문스러울 때 도덕이 언제나 제공할 명료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판사들은 다시 자의적이지도 기계적이지도 않은 선택을 할 수 있고, 여기서 흔히 (p. 205) 특징적인 사법적 미덕들(judicial virtues)을 드러낸다. 법적 결정에 대한 이 미덕들의 특별한 적합성은 왜 어떤 이들이 그러한 사법 활동을 ‘입법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미덕들은 대안들을 검토할 때의 불편부당성과 중립성, 영향을 받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에 대한 고려, 그리고 어떤 수용 가능한 일반 원칙을 결정의 이유 있는 기초로 전개하려는 관심이다. 물론 그러한 원칙들의 복수성은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결정이 유일하게 올바르다는 점이 논증적으로 입증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정보를 갖춘 불편부당한 선택의 이유 있는 산물(reasoned product)로 수용 가능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이 모든 것 속에서 우리는 경쟁하는 이익들 사이에서 정의를 행하려는 노력의 특징인 ‘저울질’과 ‘균형 조정’을 본다.

결정들을 수용 가능하게 만드는 데서 ‘도덕적’이라고 부를 만한 이러한 요소들의 중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체계들에서 해석을 지배하는 느슨하고 변화하는 전통 또는 해석 준칙들도 흔히 그것들을 희미하게 편입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법과 도덕규범들의 필연적 연결의 증거로 제출된다면, 우리는 같은 원칙들이 준수에서만큼이나 위반에서도 거의 그만큼 존중되어 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스틴(Austin)부터 오늘날까지, 그러한 요소들이 결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상기는 대체로 사법적 법창출이 사회적 가치들에 눈멀거나, ‘자동적’이거나, 충분히 이유 제시되지 못했다고 본 비판자들에게서 나왔다.

(iv) 법에 대한 비판 (The criticism of law) 때로 법과 도덕 사이에 필연적 연결이 있다는 주장(claim)은, 좋은 법체계는 앞 단락에서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은 일정한 지점들에서 정의와 도덕의 요구들에 부합해야 한다는 단언(assertion) 이상의 것이 아닐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명백한 자명한 이치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어반복은 아니며, 실제로 법에 대한 비판에서는 적절한 도덕 기준들과 요구되는 부합의 지점들 양자에 관해 의견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 법이 좋으려면 부합해야 하는 그 도덕은, 설령 그것이 미신에 기초해 있거나 노예들 또는 종속 계급들로부터 그 혜택들과 보호를 거두어 간다 하더라도, 그 법이 속한 집단의 수용된 도덕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도덕은 사실의 문제들에 관한 합리적 믿음들에 기초해 있고 모든 인간 존재들을 동등한 고려와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수용한다는 의미에서 계몽된 기준들을 의미하는가?

(p. 206) 법체계가 자기 범위 안의 모든 인간 존재들을 일정한 기본적 보호들과 자유들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논지(contention)는, 이제 법에 대한 비판에서 명백한 관련성을 가지는 하나의 이상(ideal)에 대한 진술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실천이 그것에서 벗어나는 곳에서도 보통 이 이상에 대한 말뿐인 경의가 나온다. 모든 인간의 동등한 고려에 대한 권리라는 이 견해를 취하지 않는 도덕은 어떤 내적 모순, 독단주의, 또는 비합리성에 말려든다는 점이 철학에 의해 보여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권리들을 인정하는 계몽된 도덕은 진정한 도덕으로서 특별한 신임 근거(credentials)를 가지며, 많은 가능한 도덕들 가운데 단지 하나가 아니다. 이것들은 여기서 검토될 수 없는 주장들(claims)이다. 그러나 설령 그것들이 인정되더라도, 그것들은 일차 규칙들과 이차 규칙들의 특징적 구조를 가진 국내 법체계들이 이러한 정의의 원칙들을 공공연히 무시하면서도 오래 존속해 왔다는 사실을 바꾸거나 흐려서는 안 된다. 혹 있다면, 사악한 규칙들이 법임을 부정함으로써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는 아래에서 검토한다.

(v) 법다움과 정의의 원칙들 (Principles of legality and justice) 일정한 지점들에서 도덕과 정의에 부합하는 좋은 법체계와 그렇지 않은 법체계 사이의 구별은 오류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인간 행위가 공적으로 공표되고 사법적으로 적용되는 일반 규칙들에 의해 통제될 때마다 정의의 최소한이 필연적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실 우리는 정의라는 관념을 분석하면서 이미 지적했듯이,2 그 가장 단순한 형식(법의 적용에서의 정의)은 여러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될 것이, 편견, 이익, 또는 변덕에 의해 휘지 않은 동일한 일반 규칙이라는 관념(notion)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불편부당성(impartiality)이 영국과 미국 법률가들에게 ‘자연적 정의(Natural Justice)’의 원칙들로 알려진 절차적 기준들이 확보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따라서 가장 혐오스러운 법들도 정의롭게 적용될 수 있지만, 우리는 일반 법규칙을 적용한다는 기본 관념(bare notion) 안에서 적어도 정의의 싹을 가진다.

이 최소 정의 형식의 추가 양상들, 곧 충분히 ‘자연적’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양상들은, 게임 규칙들이든 법이든 어떤 사회 통제 방법 안에 실제로 (p. 207) 무엇이 수반되는지를 살펴보면 드러난다. 그 방법은 주로 사람들의 부류들에게 전달되는 일반적 행위 기준들로 이루어지고, 그런 다음 그 사람들이 추가 공무담당 지시 없이 그 규칙들을 이해하고 그 규칙들에 부합할 것으로 기대되는 방법이다. 이런 종류의 사회 통제가 기능하려면 규칙들은 일정한 조건들을 충족해야 한다. 그것들은 이해 가능해야 하고, 대부분이 복종할 능력 범위 안에 있어야 하며, 일반적으로 소급적이어서는 안 된다. 물론 예외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결국 규칙 위반으로 처벌받는 사람들이 복종할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명백히 규칙에 의한 통제의 이러한 특징들은 법률가들이 법다움의 원칙들이라고 부르는 정의의 요구들과 긴밀히 관련된다. 기실 어떤 실증주의 비판자는 규칙에 의한 통제의 이러한 양상들 속에서 법과 도덕 사이의 필연적 연결에 해당하는 어떤 것을 보았고, 그것들을 ‘법의 내적 도덕(the inner morality of law)’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또, 이것이 법과 도덕의 필연적 연결이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매우 큰 사악함과 양립 가능하다.

(vi) 법적 유효성과 법에 대한 저항 (Legal validity and resistance to law) 실증주의자로 분류되는 법이론가들이 자기 일반 전망을 아무리 부주의하게 정식화했더라도, 앞의 다섯 표제 아래 논의된 법과 도덕규범들 사이의 연결 형식들을 부정하는 데 관심을 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실증주의의 큰 전투 구호들은 무엇에 관심을 두었는가? “법의 존재는 한 가지이고, 그 공과(merit or demerit)는 다른 것이다.”3 “국가의 법은 이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 그것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다.”4 “법규범들은 어떤 종류의 내용도 가질 수 있다.”5

이 사상가들이 대체로 증진하고자 한 것은, 도덕적으로 사악하지만 적절한 형식으로 제정되었고, 의미가 명료하며, 한 체계의 인정된 모든 유효성 기준들을 충족한 특정 법들의 존재가 제기하는 이론적·도덕적 쟁점들을 정식화할 때의 명료성과 정직성이었다. 그들의 견해는, 그러한 법들을 생각할 때 이론가와, 그것들을 (p. 208) 적용하거나 그것들에 복종하도록 요구받은 불운한 공무담당자 또는 사인(private citizen) 모두에게, 그것들에 ‘법’ 또는 ‘유효한 것’이라는 명칭을 거부하라는 권유는 혼란만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하기 위해 더 단순하고 더 솔직한 수단들이 이용 가능하며, 그것들이 관련된 모든 지적·도덕적 고려를 훨씬 더 잘 초점에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것은 법이다. 그러나 적용하거나 복종하기에는 너무 사악하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 반대 견해는 혁명이나 큰 격변 뒤에 어떤 체계의 법원들이 이전 체제 아래에서 사인들이나 공무담당자들이 법적 형식으로 저지른 도덕적 사악함들에 대한 자기 태도를 고려해야 할 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견해이다. 그들의 처벌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이전 체제의 법이 허용했거나 심지어 요구했던 것을 범죄로 만드는 노골적인 소급 입법에 의존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고,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울 수 있으며,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법의 어휘 속에 잠재한 도덕적 함의들, 특히 자연법 이론이 실려 있는 ius, recht, diritto, droit 같은 단어들을 이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다. 그때 사악함을 명하거나 허용한 제정물들(enactments)은, 그것들이 제정된 체계가 자기 입법부의 입법 권능에 대한 어떤 제약(restriction)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거나 법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생길 수 있다. 나치 지배와 그 패배의 사악함들이 남긴 심각한 사회 문제들에 대응하여, 지난 전쟁 뒤 독일에서 자연법 논증들이 부활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형식에서였다. 이기적 목적을 위해 나치 체제 동안 통과된 괴물 같은 제정법들에 대한 위반행위들(offences) 때문에 타인들의 투옥을 초래한 밀고자들은 처벌되어야 하는가? 그러한 제정법들이 자연법을 위반했고 따라서 무효(void)여서, 그 제정법들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이 투옥된 것은 사실상 불법이었고 이를 초래한 일 자체가 위반행위(offence)였다는 근거 위에서, 전후 독일의 법원들이 그들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었는가?6 도덕적으로 사악한 규칙들은 법일 수 없다는 견해를 (p. 209) 수용하려는 사람들과 거부하려는 사람들 사이의 쟁점은 간단해 보이지만, 논쟁자들은 그 일반적 성격에 관해 자주 매우 불명료해 보인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도덕적으로 사악한 규칙들을 적용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고, 타인들이 자기 방어에서 원용하도록 허용하지 않겠다는 도덕적 결정을 정식화하는 대안적 방식들이다. 그러나 이 쟁점은 언어적 쟁점으로 제시되면 잘못 제시된다. 논쟁의 어느 쪽도 “그렇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영어(또는 독일어)로 그런 종류의 논점을 표현하는 올바른 방식은 당신이 말한 대로 말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실증주의자는, 법규칙이 복종하기에 너무 사악하다고 단언하는 데 아무 모순이 없으며, 어떤 규칙이 복종하기에 너무 사악하다는 명제로부터 그것이 유효한 법규칙이 아니라는 결론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영어 용례의 무게를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자들은 이것이 사안을 정리한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명백히 우리는 이 쟁점을 언어 사용의 적절성들에 관한 것으로 본다면 적절하게 다룰 수 없다. 실제로 걸려 있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일반적으로 실효적인 규칙 체계에 속한 규칙들을 분류하는 더 넓은 개념 또는 방식과 더 좁은 개념 또는 방식의 비교상 이점(merit)이다. 우리가 이 개념들 사이에서 이유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어느 하나가 우리의 이론적 탐구들을 보조하거나 우리의 도덕적 숙고들을 진전시키고 명료화하는 방식에서, 또는 양자 모두에서,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기 때문이어야 한다.

이 두 경쟁하는 법 개념 가운데 더 넓은 개념은 더 좁은 개념을 포함한다. 더 넓은 개념을 채택하면, 이는 이론적 탐구에서 우리가 일차 규칙들과 이차 규칙들의 체계가 가진 형식적 검사 기준들에 의해 유효한 모든 규칙들을, 비록 그 일부가 한 사회 자신의 도덕이나 우리가 계몽된 또는 참된 도덕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에 위반된다 하더라도, ‘법’으로 묶어 함께 고찰하게 이끌 것이다. 더 좁은 개념을 채택하면 우리는 그러한 도덕에 거슬리는 규칙들을 ‘법’에서 배제할 것이다. 법을 사회 현상으로 이론적 또는 과학적으로 연구할 때 더 좁은 개념을 채택함으로써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것은 어떤 규칙들이 법의 다른 모든 복잡한 특징들을 드러내더라도 그 규칙들을 배제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규칙들에 대한 연구를 다른 분과에 맡기자는 제안에서는 분명 혼란 말고는 아무것도 따라 나올 수 없으며, 어떤 역사학이나 다른 법 연구 형식도 그렇게 하는 것을 유익하다고 본 적은 확실히 없다. 더 넓은 법 개념을 채택하면, (p. 210) 우리는 도덕적으로 사악한 법들이 가진 어떤 특수한 특징들과 그것들에 대한 사회의 반응도 그 안에 수용하여 연구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더 좁은 개념의 사용은 일차 규칙들과 이차 규칙들의 체계에서 보이는 사회 통제의 특수한 방법의 발전과 잠재력들을 모두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혼란스럽게 쪼갤 수밖에 없다. 그것의 사용에 대한 연구는 그것의 남용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도덕적 숙고에서 더 좁은 법 개념의 실천적 이점들은 무엇인가? 도덕적으로 사악한 요구들에 직면했을 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법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것은 법이지만 복종하거나 적용하기에는 너무 사악하다”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어떤 방식으로 더 나은가? 이것이 사람들을 더 명석하게 하거나, 도덕이 요구할 때 더 기꺼이 불복종하게 할 것인가? 나치 체제가 남긴 문제들과 같은 문제들을 처리하는 더 나은 방식들로 이끌 것인가? 관념들이 영향력을 가진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유효하지만 도덕적으로 사악한 법들을 위한 자리가 없는 더 좁은 법적 유효성 개념의 사용을 사람들에게 훈련하고 교육하려는 노력이, 조직화된 권력의 위협들 앞에서 악에 대한 저항을 굳건하게 만들거나, 복종이 요구될 때 도덕적으로 걸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더 명료하게 깨닫게 할 것 같지는 않다. 인간 존재들이 일부로부터 충분한 협력을 얻어 타인들을 지배할 수 있는 한, 그들은 법의 형식들을 자기 도구들 가운데 하나로 사용할 것이다. 사악한 사람들은 사악한 규칙들을 제정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들을 집행할 것이다. 공적 권력 남용에 맞서 사람들을 명석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 법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인증되었다는 점이 복종의 문제에 확정적이지 않으며, 공식 체계가 아무리 큰 위엄이나 권위의 후광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 요구들은 결국 도덕적 심사에 제출되어야 한다는 감각을 보존하는 것이다. 공식 체계 바깥에 어떤 것이 있고, 최종적으로 개인은 그것을 참조하여 자기 복종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이 감각은, 법규칙들이 사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악한 것은 어디서도 법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보다 더 살아 있게 유지될 가능성이 분명히 크다.

그러나 “이것은 법이지만 사악하다”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더 넓은 법 개념을 선호할 더 강한 이유는, 사악한 규칙들에 법적 인정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그것들이 낳는 도덕적 쟁점들의 다양상(variety)을 심하게 과도 단순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벤담과 오스틴처럼 법이 무엇인가와 법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의 구별을 고집한 옛 저자들이 그렇게 한 것은, 부분적으로 사람들이 이것들을 구별해 두지 않으면 사회가 치를 비용을 계산하지 않은 채 법들이 유효하지 않고 복종되어서는 안 된다는 성급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꽤 과대평가했을지도 모르는 이러한 무정부의 위험 말고도 다른 형태의 과도 단순화가 있다. 우리가 관점을 좁혀 악한 규칙들에 복종하도록 요구받는 사람만을 생각한다면, 그가 그것의 도덕적 사악함을 보고 도덕이 요구하는 일을 하는 한, 그가 자기가 유효한 ‘법’ 규칙에 직면했다고 생각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복종의 도덕적 질문(나는 이 악한 일을 해야 하는가?) 말고도 소크라테스의 처벌 수용(submission)의 질문, 곧 나는 불복종에 대한 처벌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도망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전후 독일 법원들이 직면했던 질문, 곧 “당시 효력을 가진 악한 규칙들에 의해 허용되었을 때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을 우리가 처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서로 다른 도덕과 정의의 문제들을 제기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독립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것들은 악한 법들을 어떤 목적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기를 일거에 거부함으로써 해결될 수 없다. 이것은 섬세하고 복잡한 도덕적 쟁점들을 다루는 너무 거친 방식이다.

법의 유효하지 않음(invalidity)을 그 부도덕성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법 개념은 우리가 이 별개의 쟁점들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볼 수 있게 한다. 반면 사악한 규칙들에 법적 유효성을 부정하는 좁은 법 개념은 우리를 그것들에 눈멀게 할 수 있다. 이기적 목적을 위해 괴물 같은 법들 아래서 타인들의 처벌을 초래한 독일 밀고자들이 도덕이 금지한 일을 했다는 점은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도덕은 또한 국가가, 악을 행하면서도 당시 국가가 금지한 일을 한 사람들만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도 있다. 이것이 nulla poena sine lege의 원칙이다. 이 원칙의 희생보다 더 큰 악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것을 피하기 위해 이 원칙에 침해가 가해져야 한다면, 걸려 있는 쟁점들이 명료하게 식별되는 것이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소급 처벌의 사례가 그 당시 불법이었던 행위에 대한 (p. 212) 통상적 처벌 사례처럼 보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도덕적으로 사악한 규칙들이 여전히 법일 수 있다는 단순한 실증주의 교설에 대해서는, 극단적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할 수도 있는 악들 사이의 선택을 위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장할 수 있다.

제9장 주석

185쪽. 자연법(Natural Law). 고전적·스콜라철학적·근대적 자연법 구상들과 ‘실증주의(positivism)’라는 표현의 다의성에 대한 방대한 주석 문헌이 존재하는 탓에, 자연법(Natural Law)이 법실증주의(Legal Positivism)와 대립할 때 정확히 어떤 쟁점이 걸려 있는지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본문에서는 그 중 하나의 쟁점을 식별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이 주제를 논의함에 있어 이차 문헌만을 읽는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자연법의 일차 문헌들에 나타난 어휘와 철학적 전제들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음은 쉽게 접근 가능한 최소한의 자료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자연학(Physics)』 제2권 제8장 (Ross 역, Oxford); 아퀴나스(Aquinas),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제1-2부, 문제 90–97 (D’Entrèves, 『아퀴나스: 선별된 정치적 저작』(Aquinas: Selected Political Writings), Oxford, 1948에 번역 수록); 그로티우스(Grotius), 『전쟁과 평화의 법(On the Law of War and Peace)』, 서론(Prolegomena) (The Classics of International Law, 제3권, Oxford, 1925 수록 번역본); 블랙스톤(Blackstone), 『주석(Commentaries)』, 서론 제2절.

185쪽. 법실증주의(Legal Positivism). 현대 영미권 문헌에서 ‘실증주의(positivism)’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논지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1) 법들(laws)은 인간의 명령들(commands)이다; (2) 법과 도덕규범들, 또는 존재하는 법(law as it is)과 마땅히 그래야 할 법(law as it ought to be) 사이에는 필연적 연결이 없다; (3) 법 개념들의 의미를 분석하거나 연구하는 것은 역사적 탐구, 사회학적 탐구, 도덕규범들·사회적 목적·기능에 따른 비판적 평가와는 구별되는 (그러나 적대적인 것이 아닌) 중요한 연구 분야이다; (4) 법체계는 ‘폐쇄된 논리 체계(closed logical system)’이며, 올바른 결정들(correct decisions)은 오직 미리 정해진 법규로부터 논리적 방법만으로 도출될 수 있다; (5) 도덕판단은 사실 진술들(statements of fact)처럼 합리적 논변, 증거, 또는 입증을 통해 정립될 수 없다(윤리적 비인지주의, non-cognitivism in ethics). 벤담(Bentham)과 오스틴(Austin)은 (1), (2), (3)의 견해를 지지했으나 (4), (5)는 지지하지 않았다. 켈젠(Kelsen)은 (2), (3), (5)를 수용했으나 (1), (4)는 수용하지 않았다. 논지 (4)는 흔히 ‘분석법리학자들(analytical jurists)’에게 귀속되곤 하지만, 이는 타당한 근거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륙 유럽 문헌에서는 ‘실증주의(positivism)’라는 표현이 흔히 이성에 의해서만 발견 가능한 인간 행위의 어떤 원칙이나 규칙의 존재라는 주장에 대한 전면적 거부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실증주의’ 개념의 다의성에 대한 아고(Ago)의 유익한 논의는 Americ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제51권(1957) 참조.

186쪽. 밀(Mill)의 자연법 비판. 『자연(Nature), 종교의 효용성, 유신론』에 수록된 “자연(Nature)” 에세이 참조.

187쪽. 블랙스톤과 벤담의 자연법에 대한 견해. 블랙스톤, 위 인용(loc. cit.); 벤담, 『주석에 대한 논평(Comment on the Commentaries)』 제1–6절.

193쪽. 자연법의 최소한의 내용. 자연법의 이 경험주의적 버전은 홉스(Hobbes), 『리바이어던(Leviathan)』 제14·15장과 흄(Hume), 『인성론(Treatise of Human Nature)』 제3권 제2부, 특히 제2절 및 제4–7절에 근거한다.

200쪽.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이 소설은 사회적 도덕이 개인의 공감(sympathy)이나 인도주의(humanitarianism)에 반할 경우 발생하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심오한 탐구다. 모든 도덕을 인도주의와 동일시하는 경향에 대한 귀중한 교정이 된다.

200쪽. 노예제(Slavery).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노예는 ‘살아있는 도구’였다. (정치학(Politics) 제1권 제2–4장).

203쪽. 도덕이 법에 미치는 영향. 법의 발전(development)이 도덕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아왔는지를 다룬 유익한 연구들로는 에임스(Ames), “법과 도덕규범들(Law and Morals)”, Harvard Law Review 제22권(1908); 파운드(Pound), 『법과 도덕규범들(Law and Morals)』(1926); 굿하트(Goodhart), 『영국법과 도덕법(English Law and the Moral Law)』(1953) 등이 있다. 오스틴은 이와 같은 사실적 혹은 인과적 연관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법의 영역(The Province of Jurisprudence Determined)』 제5강, 162쪽 참조.

204쪽. 해석(Interpretation). 법 해석에서 도덕적 고려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라몽(Lamont), 『가치판단(The Value Judgment)』 296–301쪽; 웩슬러(Wechsler), “헌법 해석의 중립 원칙을 향하여”, Harvard Law Review 제73권, 960쪽; 하트(Hart), 앞서 인용한 HLR 제71권, 606–615쪽 및 풀러(Fuller)의 비판, 동일호 661쪽 끝 부분(ad fin.) 참조. 오스틴의 ‘경쟁하는 유추(competing analogies)’ 사이에서 사법적 선택을 위해 열려 있는 영역을 인정한 부분과, 판사들이 자기 결정들(decisions)을 공리성의 기준에 맞추지 못했다는 비판은 『강의(The Lectures)』 제37·38강 참조.

205쪽. 법에 대한 비판과 모든 인간의 평등한 고려에 대한 권리. 이러한 권리가 단지 가능한 여러 도덕들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도덕의 규정적 특징(defining feature)이라는 견해는 벤(Benn)과 피터스(Peters), 『사회 원칙과 민주국가(Social Principles and the Democratic State)』 제2·5장, 그리고 바이어(Baier), 『도덕적 관점(The Moral Point of View)』 제8장을 참조.

206쪽. 법다움과 정의의 원칙(Principles of legality and justice). 법다움 원칙에 대해서는 홀(Hall), 『형법의 원칙(Principles of Criminal Law)』 제1장을, ‘법의 내적 도덕(the internal morality of law)’에 대해서는 풀러(Fuller), Harvard Law Review 제71권(1958), 644–648쪽 참조.

208쪽. 전후 독일에서의 자연법 이론의 부활. G. 라드브루흐(Radbruch)의 후기 견해, 하트(Hart), 그리고 이에 대한 풀러(Fuller)의 응답에 대한 논의는 모두 HLR 제71권(1958) 참조. 이 논의는 1949년 7월 바이에른주 고등법원(Oberlandsgericht Bamberg)의 판결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건은 1934년 나치 법률 위반 혐의로 남편을 신고한 아내가 남편의 자유를 불법적으로(unlawfully) 박탈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은 HLR 제64권(1951) 1005쪽에 기술된 것으로, 해당 독일 법원이 1934년 법률을 유효하지 않은 것(invalid)으로 보았다는 전제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설명의 정확성은 파페(Pappe)의 비판(“나치 시대의 사법판단의 유효성에 대하여”, Modern Law Review 제23권(1960))에 의해 최근에 도전받았다. 파페 박사의 비판은 근거가 있으며, 하트가 논한 사례는 엄밀히 말하면 가상의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파페 박사에 따르면(위 저서, 263쪽), 실제 사건에서 법원(Provincial Court of Appeal)은 법률이 자연법(Natural Law)을 위반한 경우 불법이 될(be unlawful) 수 있다는 이론적 가능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쟁점이 된 나치 법률이 이를 위반했다고 보지는 않았다. 피고는 정보를 제공할 책무(duty)가 없음에도, 순전히 사적 동기에서 그렇게 했으며, 그러한 행위가 그 상황에서 ‘모든 품위 있는 인간들의 건전한 양심과 정의감에 반하는’ 것임을 인식했음이 분명하다는 이유로 자유의 불법적 박탈(unlawful deprivation of liberty)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파페 박사가 유사 사건에 대한 독일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세밀하게 분석한 내용(268쪽 끝 부분)도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제9장 제3판 주석

185–6쪽. 실증주의(Positivism)와 ‘분리가능성 테제(separability thesis)’. 하트는 “법들이 도덕의 특정 요구를 재현하거나 충족시키는 것이 필연적 진리인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말한다. (홈즈 강연에서는 “법과 도덕규범들 사이에는 필연적 연결이 없다”고 말한다: H. L. A. Hart, “Positivism and the Separation of Law and Morals” (1957) Harvard Law Review 제71권 593쪽, 601쪽 주석 25 참조.) 이 분리가능성 테제(separability thesis)에는 난점이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하트 자신이 규칙들과 정의 사이의 연결(159–60쪽 주석 참조)과 최소한의 내용 테제(minimum content thesis)(193쪽 주석 참조)를 통해 두 가지 ‘필연적 연결’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난제를 정리하려는 다양한 시도로는 다음이 있다: John Gardner, 「Legal Positivism: 5½ Myths」, Law as a Leap of Faith 제2장; Matthew H. Kramer, 「On The Separability of Law and Morality」 (2004) Canadian Journal of Law and Jurisprudence 제17권 315쪽; James Morauta, 「Three Separation Theses」 (2004) Law and Philosophy 제23권 111쪽; Leslie Green, 「Positivism and the Inseparability of Law and Morals」 (2008) New York University Law Review 제83권 1035쪽.

185–93쪽. 고전적 자연법 이론(Classical theories of natural law). 하트가 묘사한 견해의 후손 격이나 신-토미즘적(신-아퀴나스주의적)(neothomist) 성향이 가미된 입장으로는 John Finnis의 『Natural Law and Natural Rights』, Mark C. Murphy의 『Natural Law in Jurisprudence and Politics』(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이 있다. Nigel Simmonds의 『Law as a Moral Idea』(Oxford University Press, 2007)와 비교할 것. 자연법과 실증주의의 관계들(relationships)에 대해서는 John Finnis, 「The Truth in Legal Positivism」, 『Philosophy of Law』 제7장 참조. 자연법적 도덕 이론, 법 해석 이론, 자연법 법리학 이론 간의 관계의 결여에 대해서는 Philip Soper, 「Some Confusions about Natural Law」 (1992) Michigan Law Review 제90권 2393쪽.

193–200쪽. ‘최소한의 내용’ 명제(The ‘minimum content’ thesis). 인간의 본성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고려할 때,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것들에 관한 최소한의 내용(minimum content)을 다루지 않는 규칙 체계는 어떤 경우에도 법체계(legal system)가 될 수 없다. 하트의 목록을 수정한 사례로는 Neil MacCormick, 『H. L. A. Hart』 92–99쪽, John Finnis, 『Natural Law and Natural Rights』 제4장 참조. 법의 필수적 내용에 대한 다른 접근은 Joseph Raz, 『Practical Reason and Norms』 162–170쪽 참조.

203쪽. 법과 도덕의 공유 어휘(The shared vocabulary of law and morality). ‘의무(obligation)’, ‘권리(right)’, ‘자유(liberty)’ 등의 용어들이 법과 도덕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이유에 대한 다른 설명은 Joseph Raz, 『The Authority of Law』 제8장 참조. 이에 대한 하트의 응답은 『Essays on Bentham』 153–161쪽에 실려 있다.

203–4쪽. 도덕의 법 안으로의 편입(The incorporation of morality in law). 이 부분, 그리고 더 강조되는 후기(Postscript)에서 하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부 법체계에서는 … 법적 유효성(legal validity)의 궁극적 기준들(ultimate criteria)이 정의 원칙이나 실체적 도덕 가치들(substantive moral values)을 명시적으로 편입하고 있다.” 하트는 이를 ‘연성 실증주의(soft positivism)’라 부르지만, 현재는 일반적으로 ‘편입 명제(incorporation thesis)’ 또는 ‘포괄적 법실증주의(inclusive legal positivism)’라 불린다. 관련 문헌은 기술적으로 복잡할 수 있다. 훌륭한 개관으로는 K. E. Himma, 「Inclusive Legal Positivism」, Jules Coleman & Scott Shapiro 편, 『The Oxford Handbook of Jurisprudence and Philosophy of Law』 수록. 하트의 입장에 대한 비판은 Joseph Raz, 『The Authority of Law』 제3장, 『Between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제7장 참조. 포괄적 실증주의를 발전시킨 논의로는 다음이 있다: Jules Coleman, 「Negative and Positive Positivism」 (1982) Journal of Legal Studies 제11권 139쪽; 『The Practice of Principle: In Defence of a Pragmatist Approach to Legal Theory』(Oxford University Press, 2001) 제8장; W. J. Waluchow, 『Inclusive Legal Positivism』(Oxford University Press, 1994). 드워킨(Dworkin)은 하트의 접근(Philip Soper와 David Lyons가 채택한 방식)을 『Taking Rights Seriously』 345–350쪽에서 비판하며, Coleman의 입장은 「Thirty Years On」 (2002) Harvard Law Review 제115권 1655쪽에서 비판한다.

206–7쪽. 법다움과 정의의 원칙(Principles of legality and justice). 론 풀러(Lon L. Fuller)의 논의가 영향력 있다: 『법의 도덕성(The Morality of Law)』(개정판, Yale University Press, 1969) 46–91쪽; 하트의 서평 「Lon L. Fuller, ‘The Morality of Law’」는 『Essays in Jurisprudence and Philosophy』 제16장에 수록. 하트와 풀러 간 논쟁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Peter Cane 편, 『The Hart–Fuller Debate: 50 Years On』(Hart Publishing, 2010) 수록 논문들 참조.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법의 본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Raz, 『The Authority of Law』 제11장 참조. 드워킨은 「Hart’s Postscript and the Character of Political Philosophy」 (2004) Oxford Journal of Legal Studies 제24권 1, 23–37쪽에서 ‘법다움(legality)’이라는 가치에 기초하여 자신의 이론을 재구성한다.

207–12쪽. 법적 유효성과 법 저항(Legal validity and resistance to law). 정의를 확보하려는 최소한의 시도조차 하지 않는 법은 유효하지 않다(invalid)는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의 논제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사례로는 Robert Alexy, 『The Argument from Injustice: A Reply to Legal Positivism』 (Bonnie L. Paulson & Stanley L. Paulson 번역,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법이 우리의 복종(obedience)에 대해 제기하는 도덕적 청구(claims)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 참조: Joseph Raz, 『The Authority of Law』 제12–15장; A. J. Simmons, 『Moral Principles and Political Obligation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9); Leslie Green, 『The Authority of the State』; W. A. Edmundson, 『Three Anarchical Fallacies: An Essay on Political Author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208–12쪽. ‘광의의 법 개념(broad concept of law)’을 옹호하기. 여러 저자들은 실증주의적 법 개념이 “도덕적 숙고(moral deliberation)를 촉진하고 명확하게 할 수 있다”는 하트의 주장(claim)을 발전시킨다(209쪽). 하트는 이 주장을 자신의 분석의 건전성(soundness)을 입증하기 위한 필수 요소로 보지는 않으며, 부차적 고려이거나, 광의의 법 개념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응답으로 간주한다. 문헌에서는 법 개념(the concept of law)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위해 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법의 내용(the content of the law)이 도덕적으로 좋은 결과를 위해 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 모호함이 존재한다 (예: 사법적 책무(judicial duty)를 오직 원천 기반 자료(source-based materials) 적용에 한정하려는 시도 등). 비교 자료: Neil MacCormick, 「도덕주의적 법 비판, 비도덕주의적 법 옹호(A Moralistic Case for A-Moralistic Law)」 (1985) Valparaiso Law Review 제20권 1쪽; Thomas Campbell, 『윤리적 실증주의의 법이론(The Legal Theory of Ethical Positivism)』 (Dartmouth, 1996); Jeremy Waldron, 「규범적(또는 윤리적) 실증주의」, Jules Coleman 편, 『Hart’s Postscript』; Liam Murphy, 「법 개념에 대한 정치적 물음」, 동일 저서 수록.

  1. Hume, Treatise of Human Nature, m. ii, ‘Of Justice and Injustice’. 

  2. p. 160 above. 

  3. Austin, The Province of Jurisprudence Defined, Lecture V, pp. 184–5. 

  4. Gray, The Nature and Sources of the Law, s. 213. 

  5. Kelsen, General Theory of Law and State, p. 113. 

  6. 1949년 7월 27일 Oberlandesgericht Bamberg 판결, 5 Süddeutsche Juristen-Zeitung, 207 참조. 이 판결은 H. L. A. Hart, 「Legal Positivism and the Separation of Law and Morals」, 71 Harvard L. Rev. (1958), 598 및 L. Fuller, 「Positivism and Fidelity to Law」, 같은 곳, 630쪽에서 상세히 논의된다. 다만 아래 303–4쪽의 정정된 설명을 유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