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제3판의 Leslie Green의 서론 (INTRODUCTION)

1. 하트의 메시지 (HART’S MESSAGE)

법(law)은 사회적 구성물(social construction)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우연히 특정 사회들에 나타난 특징이며, 그 출현은 제도들에 의해 운영되는 체계적인 사회적 통제(social control) 형식의 등장으로 표시된다. 어떤 면에서 법은 관습(custom)을 대체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관습에 기초해 있다. 법은 인간의 행위를 지시하고 평가하는 일차적 규칙(primary rules)들과, 이러한 일차적 규칙들을 식별하고(identify), 시행하며(enforce), 변경하는 방법에 관한 이차적 사회규칙들(secondary social rules)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다. 이러한 구성은 특정한 맥락에서 유익할 수 있지만, 오직 일부 맥락에서만 그렇고 언제나 일정한 대가를 치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정의(injustice)의 특별한 위험들과, 그 수범자들(subjects)을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규범들 일부로부터 소외시키는 위험들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적절한 태도는 찬양(celebration)보다 경계(caution)다. 더욱이 법은 때로 자신에게 없는 객관성(objectivity)을 가장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판사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실제로는 그들이 법을 창출하는 중대한 권력(power)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과 재판(adjudication)은 정치적이다(political).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법이론(legal theory) 역시 정치적이다. ‘순수한 법이론(pure theory of law)’은 있을 수 없다. 법 자체에서 끌어온 개념들만으로 세워진 법리학(jurisprudence)은 법의 본성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사회이론(social theory)과 철학적 탐구(philosophic inquiry)의 자원들에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법리학은 법률가들이나 법학 교수들의 전유물도 아니며, 심지어 그들의 자연스러운 서식지도 아니다. 그것은 더 일반적인 정치이론(political theory)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 가치는 의뢰인들에게 조언하거나 사건들을 결정하도록 돕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제도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에 대한 어떤 도덕적 평가(moral assessment)를 뒷받침하는 데 있다. 그러한 평가는 법의 본성뿐 아니라 도덕(morality)의 본성에도 민감해야 한다. 도덕은 복수적이고 상충하는 가치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현대 법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들 가운데 하나인 H. L. A. 하트의 법의 개념(The Concept of Law)의 가장 중요한 관념들이다. 그러나 다른 중요한 책들과 마찬가지로, 하트의 책도 실제 독해만큼이나 풍문(rumour)으로 알려져 있다. 그 책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그 책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방금 제시한 압축적 요약이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들이 들은 바는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의아하게 만든다. 하트는 법이 규칙들의 폐쇄적 논리 체계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는 법이 좋은 것, 곧 사회질서의 다른 형태들 안의 결함들을 치유하는 사회적 성취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는 법들은 대체로 명확하며 법원들에 의해 도덕적 가치들과 무관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는 법과 도덕이 개념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서로 분리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는 법리학이 가치중립적이며, 그 진리들이 ‘법(law)’ 같은 단어들의 참된 의미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확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짧은 답은 ‘아니다’이다. 하트는 그 어느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트의 메시지에 관한 이 왜곡된 판본들은 세 가지 원천을 가진다. 첫째는 철학 전반에 익숙한 어려움이다. 그가 다루는 문제들은 복잡하며, 참과 거짓 사이의 간격은 종종 미묘하거나 쉽게 간과되는 구별이다. (예컨대 법과 도덕이 분리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들이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는 역사적 요인이다. 반세기가 지난 뒤에는 이 책의 언어와 사례들이 사회적으로, 때로는 철학적으로도 멀게 느껴진다. 오늘날 우리 중 많은 이는 관습적 사회질서들을 여전히 ‘원시적(primitive)’이라고 지칭하거나, 어떤 것의 본성에 관한 설명을 그것의 개념에 대한 ‘해명(elucidation)’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는 독자의 기대와 관련된다. 모든 책에는, 말하자면 ‘암시된 독자(implied reader)’가 있다. 하트의 경우 그것은 우리의 주요 정치 제도들 가운데 하나의 본성과 그것이 도덕 및 강제력(coercive force)과 맺는 관계들에 관해 철학적으로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실제 독자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실천적 도움을 찾아 법리학으로 향한다. 예컨대 그들은 우리가 헌법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또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판사들로 선택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법이론에 관한 책이 법에 대해 가지는 관계가, 급식 이론에 관한 책이 급식에 대해 가지는 관계와 같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곧 다양한 상이한 경우들에 적용 가능한 일반적인 ‘방법(how-to)’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하트의 책은 요약이 필요 없을 만큼 충분히 명료하지만, 그 주제들 일부를 탐색하는 일은 그러한 오해들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법과 사회적 규칙들(social rules), 강제(coercion), 도덕(morality)에 관한 그의 견해들을 검토한 뒤 몇 가지 방법론적 논점들을 간단히 훑어볼 것이다. 나는 중립으로 남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하트의 법이론은 부분적으로 올바르고, 부분적으로 잘못되었으며, 여기저기서 약간 모호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것은 평가(assessment)가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빗나가거나 빗나가게 되는 영역들을 부각하고 몇몇 지점들에 관해 비판적 논평을 하겠지만, 평정(appraisal)은 독자의 몫이다.

2.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법 (LAW AS A SOCIAL CONSTRUCTION)

법들(laws)과 법체계들(legal systems)은 자연(nature)의 사항들이 아니라 인위적 산물(artifice)의 사항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사회적 구성물들(social constructions)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이 언급할 가치가 있는 어떤 대비를 표시하는가?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이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이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생각한다. 데리다(Derrida)는 “il n’y a pas de hors-texte”(텍스트 바깥은 없다)라고 곧잘 짓궂게 말했다. 그것이 이해 가능하더라도 그것은 무관할 것이다. 누군가가 “인종(race)은 사회적 구성물이다”라고 말하고 나서, “경찰봉들(truncheons)과 감옥들(prisons)처럼 말이다”라고 해명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것은 누군가가 신(God)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알고 보니 그 대화 상대자는 개들(dogs)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내가 법이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말할 때, 내 뜻은 그것이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법은 명령들(orders)과 규칙들(rules) 같은 제도적 사실들(institutional facts)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들은 사람들이 사고하고 행위함으로써 만들어진다.1 그러나 법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물리적 우주 안에 존재하며, 또한 사회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 창출된다. 아마도 이것은 진부한 말일 수 있다. 유행에 맞는 척하기 위해 ‘예절의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 of etiquette)’에 관해 말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별 의미가 없다. 예절들(manners)이 관행적(conventional)이라는 것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2 그것들은 공통 실천(common practice)에 의존하고, 역사를 가지며,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법도 그와 같다는 것은 눈이 부실 만큼 명백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스토아적 ‘자연법(natural law)’ 견해에 관한 다음의 유명한 요약을 보라.

진정한 법은 자연(Nature)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right reason)이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적용되며,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 로마와 아테네에서 다른 법이 있을 수 없고, 현재와 미래에 서로 다른 법이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법만이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에 타당할 것이다…3

이 영원하고 보편적인 법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우리는 그것을 아무도 바꿀 수 없다고 듣는다. 자연법(natural law)은 의지(will)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reason)의 문제다. 이 모든 것을 여전히 믿는 법이론가들을 찾기는 어렵지만,4 그 일부를 믿는 이들은 많다. 예컨대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은 우리의 법이 조약들(treaties), 관습들(customs), 헌법들(constitutions), 제정법들(statutes), 판례들(cases)에서 발견되는 규범들뿐 아니라, 그곳에서 발견되는 규범들에 대한 최선의 정당화(best justification)를 제공하는 도덕 원칙들(moral principles)도 포함한다고 논변한다.5 그의 설명에 따르면, 도덕 원칙들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들(things justified)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지만, 정당화들 자체는 그렇지 않다. 정당화(justification)는 사건(event)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논증(argument)이다. 정당화를 믿거나(believing), 수용하거나(accepting), 단언하는(asserting) 것은 사건들이다. 그러나 드워킨은 법이 구성된 물건들에 사람들이 그것의 정당화라고 믿었거나, 그것의 정당화로 수용했거나, 그것의 정당화라고 단언한 것들을 더한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법이 구성된 물건들에 그것에 대해 실제로 정당화들인 도덕 원칙들을 더한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어떤 것이 법이기에 충분한 조건이, 그것이 이미 법인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최선의 도덕적 정당화이거나 그 정당화로부터 따라 나온다는 데 있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키케로(Cicero)와 꼭 마찬가지로, ‘올바른 이성(right reason)’의 요구사항이라는 사실에 그 지위를 빚지고 있는 법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건전한 정당화(sound justification)를 건전하지 않은 것으로 바꿀 수 없으므로, 당신은 또한 우리가 바꿀 수 없는 법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어떤 도덕 원칙이 어떤 배열을 정당화하는지는 누가 그것이 그렇다는 점을 알거나 믿는지에 의존하지 않으므로,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법, 곧 많은 법이 있을 수 있다. 도덕적 지식의 전망에 따라서는, 알 수조차 없는 법도 있을 수 있다.

하트(Hart)의 접근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한다. 법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의도적으로든 우연히든 그것을 거기에 두었기 때문에 거기에 있다. 그것은 모두 역사를 가진다. 그것은 모두 바뀔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알려져 있거나 알려질 수 있다. 우리의 법들 중 일부는 좋은 정당화들(good justifications)을 가지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으며, 어쨌든 정당화들은 법을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하려면 실제 인간의 개입(actual human intervention)이 필요하다. 명령들(orders)이 내려져야 하고, 규칙들이 적용되어야 하며, 결정들이 내려져야 하고, 관습들이 출현해야 하며, 또는 정당화들이 지지되거나 단언되어야 한다.

법철학자들은 그러한 인간 개입들(human interventions)에 의해 설정된 것들을 포괄하기 위해 고풍스러운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들은 그것들이 ‘정립되었다(posited)’고 말한다. 모든 법이 정립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법실증주의자(legal positivist)이며, 사회구성주의자들(social constructivists)은 그 한 종류다. 그러나 모든 실증주의자가 사회구성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한스 켈젠(Hans Kelsen)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모든 법들(laws)이 정립된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법체계에는 정립된 것이 아니라 오직 ‘전제된(presupposed)’ 규범(norm)이 적어도 하나 포함된다고도 생각했다.6 켈젠에 따르면, 법규범(legal norm)은 그것이 유효한(valid) 경우에만 존재하며, 여기서 ‘유효한(valid)’이란 그 수범자들(subjects)이 그것에 부합해야 한다(ought to conform)는 뜻이다. 그는 흄(Hume)과 칸트(Kant)를 따라 ‘있다(is)’만으로부터는 ‘마땅하다(ought)’가 나올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적 구성물(social construction)도, 또는 그것들의 묶음도, 결코 하나의 규범으로 합쳐질 수 없다. 그것들이 규범들을 산출하려면, 한 사회의 근본적 법제정 과정들(fundamental law-making processes)은 유효한 것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원초적 헌법(original constitution)이 진정한 권위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아래의 어떤 것도 그렇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그 기초 규칙들(ground rules) 아래에서 창출된 자료들을 법으로 간주하려면, 원초적 헌법이 구속력 있다고 전제할 필요가 있다. 이제 전제(presupposition)는 정당화(justification)와 마찬가지로 사건(event)이 아니다. 켈젠은 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싶다면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정립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활동들의 산물을 법으로서(as law) 알고 싶다면,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있다고 논변했다. 그러므로 켈젠은 법실증주의자이지만 사회구성주의자는 아니다. 그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규범들을 우리가 연구하는 방식들, 곧 사회학적, 심리학적, 역사적 탐구를 법리학(jurisprudence) 안의 ‘이질적 요소들(alien elements)’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7

하트(Hart)는 켈젠의 견해 역시 거부한다.8 법의 궁극적 기초는 정당화도 전제도 아니라, 사람들이 특정한 것들을 사고하고 행함으로써 생겨나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법리학(jurisprudence)은 이 구성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더 일상적인 사회적 사실들로부터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설명한다. 하트는 이 설명을 ‘기술적 사회학에 관한 하나의 에세이(an essay in descriptive sociology)’라고 부르기까지 한다(vi).9 그것은 아마도 너무 멀리 나아간 말이다. 그것은 분석적 법철학(analytic legal philosophy)의 한 에세이지만, 이론적으로 예리한 법사회학이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을 개념들에 의존하는 에세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규칙(social rule)이라는 개념이다.

(i) 법, 규칙, 관행 (Law, Rules, and Conventions)

하트는 홉스(Hobbes), 벤담(Bentham), 오스틴(Austin)에게서 발견되는 더 이른 실증주의 설명을 거부한 뒤, 규칙들(rules)이 법의 가장 중요한 구성 단위들(building blocks)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법이 사령들(commands), 위협들(threats), 복종(obedience)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했다. 주권자(sovereign)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습관적 복종(habitual obedience)을 향유하지만 스스로는 다른 누구에게도 습관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이다. 법은 힘(force)의 위협에 의해 뒷받침된 주권자의 일반적 사령(general command)이다.

1977년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 주권의 문제를 중심으로 세워지지 않는 정치철학이다…. 우리는 왕의 목을 잘라야 한다. 정치이론에서는 그것이 아직 이루어져야 한다.”10 이 국왕살해(regicide)의 소식은 영국해협을 건너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하트는 이미 오래전에 그 일을 끝냈기 때문이다. 제III장과 제IV장에서 그는 모든 법들이 사령들(commands)인 것은 아니라는 점, 법체계가 주권자의 속성들을 지닌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점, 법은 그 창출자들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된다는 점, 그리고 위협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할 의무들을 창출할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근저에서 주권 설명에 빠져 있는 것은 사회적 규칙이라는 개념이다. 규칙들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그것들이 주권, 권한들(powers), 관할(jurisdiction), 유효성(validity), 권위(authority), 법원들(courts), 법들(laws), 법체계들(legal systems), 그리고 하트가 논변하듯 심지어 정의의 한 종류까지 포함하여 법 안의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는 열쇠임을 알게 될 것이다. 법 자체는 사회적 규칙들의 결합(union)이다. 곧 사람들에게 책무들(duties)을 부과하거나 권한들(powers)을 부여함으로써 행위를 안내하는 일차 규칙들(primary rules)과, 그 일차 규칙들의 식별, 변경, 집행을 마련하는 이차 규칙들(secondary rules)의 결합이다. 이차 규칙들 가운데 궁극적 승인 규칙(rule of recognition)은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일차 규칙들을 적용하는 역할을 맡은 이들의 관습적 실천(customary practice)인 승인 규칙은 어떤 행위들이 법을 창출하는지를 정함으로써 법적 유효성의 기준들(criteria of legal validity)을 제공한다. 따라서 한 법체계의 근본 헌법(fundamental constitution)은 도덕적 정당화들(moral justifications)이나 논리적 전제들(logical presuppositions)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원들(courts), 공무담당자들(officials), 사적 개인들(private persons)의 복합적인 … 실천(complex … practice)’에 의해 창출된 이 관습적 사회규칙(customary social rule)에 기초해 있다(107쪽). 하트는 영국의 승인 규칙이 “여왕과 의회가 제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법이다(Whatever the Queen in Parliament enacts is law)”와 같은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의회 제정물들(Parliamentary enactments)은 그 도덕적 자격 근거들(moral credentials) 때문에도, 어떤 논리적 전제 때문에도 법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되는 관습적 규칙이 그것들을 그러한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법이다.

따라서 법은 사회적 규칙들(social rules)로 구성된다. 그러면 규칙들 자체는 어떤가? 그것들 역시 사회적 구성물들이며, 하트는 그것들이 실천(practice)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흔히 ‘규칙의 실천 이론(practice theory of rules)’이라고 불린다.) 관습적 규칙들(customary rules)은 행태적 반복적 일양성(behavioural regularity) 안에 ‘외부 측면(external aspect)’을 가진다. 사람들은 공통된 방식으로 행위한다. (규칙에 따라, 이것은 그 규칙이 요구하는 것에 부합하는 일이나 그것을 타인들에게 적용하는 일을 포함할 수 있다.) 규칙들은 또한 하트가 ‘수용(acceptance)’이라고 부르는 복합적 태도를 포함하는 ‘내부 측면(internal aspect)’을 가진다. 수용이란, 그 반복적 일양성을 행위를 안내하고 평가하는 기준(standard)으로 사용하려는 의향이며, 특히 부합(conformity)을 칭찬하고 위반들(breaches)을 비판하며, 그러한 칭찬과 비판을 적절한 것으로 대우하려는 의향이다. 수용은 찬동(approval)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 규칙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려는 그들의 의향의 문제다. 사람들은 하트의 의미에서 규칙들을 수용할 수 있다. 그 규칙들이 좋은 규칙들이라고 생각해서, 또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또는 두려움이나 동조주의(conformism)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56–7, 115, 257쪽). 밀턴(Milton)을 믿어도 된다면, 사탄(Satan)조차도 그것이 나쁜 규칙이라는 근거에서 하나의 규칙을 수용할 수 있다. “악이여, 나의 선이 되어라(Evil be thou my good).” 중요한 전부는 사람들이 어떤 기준에 수렴하고, 그것을 행위의 지침으로 사용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규범적인 것(normative)으로 대우한다는 점이다.

규칙의 실천 이론(practice theory of rules)은 논쟁적이다. 몇 가지 난점들을 주목한 다음, 일정한 반론들을 빗겨 가려는 하트의 시도로 넘어가자. 하트는 규칙의 존재에 대한 하나의 검사 기준(test)을 원한다. 그 검사 기준은 규칙 따르기와 우연적이거나 순전히 습관적인 행태상의 패턴들(patterns in behaviour)을 구별하고, 관습적 규칙이 의무적이거나 구속력 있는(obligatory or binding) 것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실천 이론은 이를 제공하지 못한다.11 사회적 실천들이 아닌 규칙들이 있다(예컨대 개인의 규칙들). 규칙들이 아닌 수용된 사회적 실천들도 있다(예컨대 저항하기보다 강도에게 지갑을 넘겨주는 공통적이고 수용된 실천). 그리고 규칙을 인용하는 것은 자기 행위에 대한 정당화로서 제시될 수 있지, 단지 그것에 대한 어떤 정당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징후(sign)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실천 이론과 맞지 않는다. 더구나 의무라는 관념(the idea of obligation)을 이해하기 위해 사회적 규칙이라는 개념이 필요한지도 명확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항공 여행에 대해 탄소 상쇄(carbon offsets)를 구매할 의무가 있다고 믿으면서도, 그것을 하는 공통 실천이 있다고 상정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의 후기(Postscript)에서 하트는 자신의 설명을 한정함으로써 그러한 비판들에 대응하려 한다. 이제 그는 모든 규칙들이 실천 규칙들(practice rules)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관행적 규칙들(conventional rules)은 그러하며, 그것들이 법의 기초를 이룬다. 어떤 규칙은 “한 집단의 그것들에 대한 일반적 부합(general conformity)이 그 개별 구성원들이 수용할 이유들의 일부인 경우 …” 관행적이다(255쪽). 우측 통행 규칙은 관행이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그것을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졸릴 때 운전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은 관련된 의미에서 관행이 아니다. 졸린 운전자들이 많은 도로에서는 깨어 있을 이유가 더 많지, 더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트는 궁극적 승인 규칙(rule of recognition)이 관행이라고 본다. “[분명히] 영국 판사가 의회의 입법을 다른 원천들에 대해 최고성을 갖는 법의 원천(a source of law having supremacy over other sources)으로 대우하는 이유(또는 미국 판사가 헌법을 그렇게 대우하는 이유)는, 그의 사법 동료들이 그들의 선임자들이 그래 왔듯이 이에 의견을 같이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267쪽). 법은 “판사들과 법률가들이 수용한 단지 하나의 관행적 승인 규칙(a mere conventional rule of recognition)”에 기초해 있다(267쪽). 두 번째 정식화에서는 ‘단지(mere)’라는 말을 삭제해야 한다. 공무담당자들(officials)이 승인 규칙(또는 다른 근본 규칙들)에 부합하는 유일한 이유가 다른 이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다. 승인 규칙들은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으로 믿어지는 경우가 드물다(설령 주변부에서는 자의적인 것으로 믿어지더라도 그렇다). 예컨대 영국에서 법의 원천으로서 의회 제정법들(parliamentary statutes)의 최고성은, 그것들을 최고적인 것으로 대우하는 공통 실천에만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실천이 민주적이거나 우리 문화의 중심에 있다는 믿음에도 기초해 있을 수 있다. 미국에서 헌법의 최고성은 공통 실천에만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의로운 정부 형태를 수립한다는 믿음이나, 신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지혜로운 사람들이 그것을 정했다는 믿음에도 기초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믿음들은 올바를 필요가 없고, 균일하게 공유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들 중 일부는 보통 공통 실천에 근거한 이유들과 함께 존재한다. 하트의 의미에서 승인 규칙이 관행적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무담당자들이 그것을 적용할 다른 어떤 이유들을 가지고 있든, 그러한 취지의 공유된 공통 실천(shared common practice to that effect)도 없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수정을 감안하더라도, 맞서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다.12 승인 규칙(rule of recognition)은 의무- 또는 책무부과 규칙(obligation- or duty-imposing rule)이다. 그것은 법의 원천들(sources of law)을 식별할 뿐 아니라, 판사들과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식별된 법을 적용하라고 지시한다. 실천 이론에 따르면, 사회적 규칙이 책무(duty)를 부과하는 것은 다음의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이다. (a) 그 규칙이 사회적으로 필요하다고 믿어지고, (b) 강한 사회적 압력(social pressure)에 의해 강화되며, (c) 그것이 규범-수범자(norm-subject)의 당면한 자기이익(self-interest)과 충돌할 수 있는 경우이다(86–8쪽). 이러한 조건들이 여기서 충족되는가? 그 조건들은 사실적(factual)이므로, 어느 주어진 사례에서든 우리는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법원들과 다른 이들이 법에 대한 확정된 검사 기준들(settled tests for law)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개연성이 있고, 그것들로부터의 중대한 일탈은 부합하라는 강한 압력에 의해 강화될 것임은 그럴듯해 보인다. (예컨대 미국 지방법원이 대법원의 모든 판결들을 단순히 무시하거나, 샤리아법(Sharia)을 구속력 있는 법의 원천으로 적용하기 시작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타날지 상상해 보라.) 그러나 관행적 규칙의 경우, 조건 (c)가 왜 충족되는지를 보기는 더 어렵다. 어떤 관행적 기준(conventional standard)이 중요하다고 믿어질수록, 그것이 관행적임이 알려져 있다고 가정할 때 비부합(non-conformity)에 대한 유혹은 더 적어진다. 우리는 모두 좌측으로 운전할 수도 있고 우측으로 운전할 수도 있지만, 공통 실천이 있을 때에는 대열을 이탈하여 잘못된 쪽으로 운전할 유혹이 별로 없다. 이탈하려는 유혹은 다른 종류의 규칙들, 특히 무임승차에 노출되는 공공재(public goods)를 지탱하는 규칙들의 특징이다. 그러나 규칙이 관행적일 때에는 책무와 욕망이 같은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의무 또는 책무와 이익 사이의 지속적 충돌 가능성(the standing possibility of conflict between obligation or duty and interest)’은 존재하지 않는다(87쪽). 위에서 말했듯이, 판사들은 승인 규칙들 사이에서 선호들(preferences)을 가질 수 있으며, 그 선호들은 정당성(legitimacy) 등에 관한 견해들을 반영할 수 있다. 그러나 각자의 지배적 태도가 군중과 함께 가고자 하는 욕망이라면, 우리가 의무들(obligations)에서 발견하는 익숙한 규범적 밀고 당김(normative push and pull)의 감각은 이례적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하트는 처음 설명에서 진실에 더 가까이 갔다. 대열 이탈은 판사들에게조차 유혹적일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비판과 부합하라는 강한 압력의 계기이다. 아쉽게도 그것은 규칙이 전혀 없고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하나의 이유(reason of general application)만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사회적 규칙들(social rules)의 정확한 성격 규정에 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넓게 하트적인 법 설명 안에 들어맞을 수 있는 다른 선택지들도 있다.13 그러나 단순한 실천 이론도, 그것에 대한 하트의 관행주의적 수정도, 그 자체만으로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ii) 규칙들의 도달 범위 (The Reach of Rules)

법에 대한 규칙 기반 이론(rule-based theory of law)에 관한 독립적인 의문의 원천은 그 범위(scope)와 관련된다. 사회적 규칙들(social rules)이 법적 현상들(legal phenomena)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는 점이 입증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들은 충분한가? 여러 이유에서 그렇지 않다.

첫 번째 이유는 하트(Hart) 자신이 강조한다. 일차 규칙들과 이차 규칙들의 모든 체계가 법체계인 것은 아니다. 북미 하키 리그(National Hockey League)는 하나의 규칙 체계를 가지고 있다. 곧 선수들, 심판들(officials), 커미셔너의 행위를 지시하는 일차 규칙들과, 공식 규칙들(official rules)에 작용하는 승인, 변경, 판정의 이차 규칙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하키 규칙들은 법체계가 아니다. (물론 그것들이 법체계와 많이 닮아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무엇이 빠져 있는가? 하키 규칙들은 특수 목적적(special-purpose)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게임을 규율하지만, 법은 삶의 많은 부분을 규율할 수 있다. 그리고 법체계는 하키 규칙들을 포함하여 하키를 규율하지만, 하키 규칙들은 법을 규율하지 않는다. 하트는 더 나아가, 법은 포괄적으로 규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규칙들의 체계가 실제로 재산(property), 약정들(agreements), 힘의 사용(use of force)을 포함한 넓은 범위의 것들을 규율하지 않는 한 법체계가 아니라고 논변한다(193–200쪽). 하트는 이것을 법체계의 ‘최소한의 내용(minimum content)’이라고 부르며, 그 내용을 규율하는 일이 인간 생존(human survival)을 증진하고 인간 생존은 (그의 가정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므로, 모든 법체계들은 어떤 종류의 선(good)을 지향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법체계들에 관해 ‘형식적(formal)’ 검사 기준을 가진다는 문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서두에서 말했듯이, 하트의 이론이 법체계들을 논리학이나 수학의 어떤 형식 체계(formal system)와 같은 것으로 표상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인 이유들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지점은 훨씬 더 큰 타격력을 가진다. 어떤 것도 어떤 법체계에 속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법(a law)이 아니기 때문에, 법에 대해서도 순수하게 형식적인 검사 기준은 있을 수 없다. 법들(laws)은 특정한 종류(kind)의 규범 체계 안에서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는 규칙들이며, 그 체계는 부분적으로 그 내용에 의해 구별된다.

두 번째 지점은 하나의 명확화로 이어진다. 어떤 저자들은 법체계 안의 모든 것이 규칙은 아니기 때문에 하트의 설명이 부정확하거나 불완전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기준들(standards)’이나 ‘원칙들(principles)’ 같은 다른 종류의 규범들도 발견된다고 말해진다.14 위에서 보았듯이(xviii쪽), 이것들이 법들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들(moral justifications for laws)을 지목하려는 것이라면, 하트의 설명에서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공무담당 방식으로 채택되거나 지지되지 않는 한 법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나 ‘기준들’과 ‘원칙들’은 유연하거나 반박 가능한(defeasible) 일반적 법 규범들을 지목하기 위해서도 흔히 쓰인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되면, 그것들은 하트의 이론에 쉽게 들어맞는다. 어떤 쟁점에 대한 법의 관련성(bearing)을 알기 위해서는, 서로 교차하고 충돌할 수 있는 많은 상이한 규칙들의 순효과(net effect)를 알아야 하며, 그 충돌을 해소하는 허용 가능한 방식이 하나보다 많을 수 있다. 이것이 반박가능성(defeasibility)의 한 원천이다. 또 다른 원천은, 하트가 제VII장에서 설명하듯이, 모든 규칙이 어느 정도 모호하고 개방적 직조를 지닌(open-textured)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규칙이 명확히 적용되는 사례들과 명확히 적용되지 않는 사례들이 있지만, 또한 그것이 적용된다고 논변 가능하고(arguably applies), 많은 작업, 특히 항소심 법원들(appellate courts)에서의 작업이 논변 가능하지만 법적으로 불확실한 사건들을 포함하는 사례들도 있다. 한 의미에서 법적 불확정성(legal indeterminacy)은 규칙의 주변부(margins)에서 발생하지만, 그것은 주변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법체계와 그 체계 안의 모든 규칙의 특징이며, 그 결과 “크고 중요한 영역이 법원들과 다른 공무담당자들의 재량(discretion)을 위해 열려 남아 있다”(136쪽). 법원들은 법의 권위 있는 적용들을 하는 특별한 과업을 가지지만, 또한 입법기관들과 공유하는 또 다른 과업, 곧 새로운 법을 창출하는 과업을 가진다. 이 법창출 권한(law-creating power)을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를 아는 것은 대체로 어떤 종류의 규칙들을 적용하는 일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천적 판단(practical judgement)을 요구한다. 불확정성을 해소하는 법원들의 역할은, 항소심 법원들의 작업만을, 또는 주로 그 작업을, 기실 어떤 법원들의 작업만을 바라보면서 법의 일반 이론을 발전시키는 일이 오도적일 것임을 뜻한다. ‘선택 효과(selection effect)’ 때문에 법적 불확실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규칙이라는 관념 자체가 법의 유동적이고 논쟁적인 성격을 포착하기에는 너무 말끔히 재단된 것(cut-and-dried)이라고 보는 많은 이들이 이 함정에 빠진다. 그들은 법원들 자체를 구성하는 꽤 확립된 규칙들이나, 사람들이 법원들 근처에도 가지 않고 무엇을 할지를 결정하는 데 사용하는 일상적 법규칙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운전자들은 도로 표지판의 “정지(Stop)”가 “눈 깜박임을 멈추라”가 아니라 “차를 멈추라”를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지점에 관해 사법적 판정은 필요하지 않으며, 이것은 작동 중인 법(law in action)의 전형적 사례다.

세 번째 지점은 법적 규칙들의 체계 안의 모든 것이 어떤 종류의 규칙인 것도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예컨대 『1998년 영국 인권법(UK Human Rights Act)』 제6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조에서 ‘공공기관(public authority)’은 다음을 포함한다: (a) 법원 또는 재판소, 그리고 (b) 그 기능들 중 일정한 것이 공적 성격의 기능인 사람….” 이는 규칙인가? 그것은 정의(definition)이다. 하지만 정의가 단어들을 사용하기 위한 규칙이라고 본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는 어떤 행위도 요구하거나 권한을 부여하거나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규범(norm)은 아닌 규칙(rule)일 것이다. 정의들의 법적 역할은, 그것들이 이 법 제1조(Section 1)에 있는 규범, 곧 “공공기관이 협약상 권리(Convention right)와 양립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은 불법(unlawful)이다”라는 규범과, 다른 곳에서 제공되는 불법 행위에 대한 구제들과 함께(along with)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설명된다. 이것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말한다. 다만 암묵적으로 그렇게 한다. 이런 문맥에서 ‘불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법 안의 자료들 중 규범이기는 하지만 규칙은 아닌 것들에 접근해야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예컨대 사법적 결정은 종종 특정한 명령(order)으로 끝난다. 곧 어떤 사람 또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를 지급하거나, 무언가를 감수하라고 말하는 지시(directive)다. 이러한 일회적 명령(one-off order)은 규칙이 아니라 개별 규범(individual norm)이다. 개별 규범들만을 사용해 통치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것들 없이 통치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법원들이 사람들의 법적 지위들을 권위 있게 결정할 수 있으려면, 특정한 사람들을 구속하는 판정들(rulings)을 내려야 한다. 따라서 규칙들은 법들(laws)과 법체계들(legal systems)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우리는 또한 규칙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하도록 기대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규칙들과 맞물리는 다른 자료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며, 규칙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법적 의사결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하트는 이러한 주제들 가운데 일부에 다른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그것들 모두는 그 이론 안에 수용될 수 있다. 널리 퍼진 오해와 달리, 하트는 법이 단순히 규칙의 문제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규칙들이 모든 법적 현상들을 설명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 기실 그는 그러한 오류를 경계한다. “일차 규칙들과 이차 규칙들의 결합은 법의 많은 측면들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 결합에 부여된 중심적 지위를 가질 만하지만, 이것만으로 모든 문제를 밝힐 수는 없다.… [그것은] 법체계의 중심에 있지만, 전체는 아니다….” (99쪽) 관심을 가질 만한 다른 것들이 많이 있으며, 법리학(jurisprudence)은 그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3. 법과 권력 (LAW AND POWER)

이제 우리는 다음을 얻었다. 법(law)은 사회적 규칙들(social rules)의 구성물이며, 그 규칙들 자체도 실천(practice)으로부터 구성된다. 이는 결국 사회적 통제(social control)의 수단인 제도를 다소 안이하게 바라보는 견해처럼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갈등(conflict), 강제(coercion), 권력(power)은 어떻게 되는가?

(i) 법에서의 분업 (The Division of Labour in Law)

하트(Hart)는 법을 위협(threats)으로 뒷받침된 주권자(sovereign)의 명령들(orders)로 보는 오스틴(Austin)의 하향식 피라미드적 관점(top-down, pyramidal view)에 반대한다. 그 관점이 조잡했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유익한 경계 효과를 가졌고, 하트가 법실증주의(legal positivism)를 더 섬세하게 만들면서도 그 타격력(punch)의 일부를 잃었다고 느낄 수 있다. 법은 합의(consensus)와 일치(agreement)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갈등(conflict)과 불일치(disagreement)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15 물론 이것이 항소심 법원들(appellate courts)에서의 많은 활동이 고도로 정치화되어 있으며, 확립된 법(settled law)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논변 가능한 사건들을 처리하는(settling arguable cases) 데 있다고 하는 익숙한 주장이라면, 이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방금 전 우리는 이것이 하트의 이론에 어떻게 들어맞는지를 보았다. 그러나 하트는 사태가 출발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점들에서 어느 정도의 합의를 요구한다. 적어도 승인 규칙(rule of recognition)은 어떤 활동들이 법을 만드는지에 관한 합의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누구의 합의인가? 다음은 드워킨(Dworkin)이 하트의 이론을 재현한 방식이다.

법의 참된 근거들(grounds of law)은 공동체 전체에 의한 하나의 근본적 지배 규칙(master rule)의 수용(acceptance)에 놓여 있다. 그는 이것을 ‘승인 규칙(rule of recognition)’이라고 부른다…. 오스틴에게 캘리포니아의 제한 속도가 55마일이라는 명제가 참인 이유는 단지 그 규칙을 제정한 입법자들이 우연히 그곳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트에게 그것이 참인 이유는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주 및 연방 헌법 안의 권위 체계(scheme of authority)를 수용해 왔고, 계속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16

이것이 법의 ‘근거들(grounds)’에 대한 설명으로서 잘못된 점은 충분히 분명하다. 캘리포니아의 많은 사람들은 ‘주 및 연방 헌법 안의 권위 체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며, 어떤 이들은 주 헌법(state constitution)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또한 그것은 하트의 이론에 대한 해석으로서도 잘못된 점이 있다. 법 이전의(pre-legal) 사회에서 사회 규범들(social norms)은 광범위한 지지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보다 단순한 구조[법의 출현 이전]에서는, 공무담당자들(officials)이 없기 때문에, 규칙들은 집단의 행태에 대한 비판 기준들을 설정하는 것으로서 널리 수용되어야 한다. 그곳에서는 내부 관점(internal point of view)이 널리 퍼져 있지 않다면 논리적으로 어떤 규칙들도 존재할 수 없다”(117쪽). 관습적 규칙들(customary rules)은 일반적 동의(general buy-in)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일차 규칙들과 이차 규칙들의 결합이 있는 곳에서는… 규칙들을 집단의 공통 기준들(common standards)로 수용하는 일이, 통상적 개인이 그 자신 몫으로 규칙들에 복종함으로써 규칙들에 묵종(acquiescing)하는 비교적 수동적인 문제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것은 유효한 규칙이다’라는 특징적 규범적 언어 사용을 수반하는 내부 관점이 공무담당자 세계에 한정될 수도 있다. 이러한 더 복잡한 체계에서는 공무담당자들만이 체계의 유효성 기준들(criteria of validity)을 수용하고 사용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된 사회는 개탄스러울 만큼 순종적일 수 있고, 결국 도살장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그것에 법체계라는 명칭을 부정할 이유는 거의 없다”(117쪽).

내가 이 구절을 길게 인용한 것은, 그것이 법의 본성(nature of law)을 이해하는 데 중대한 지점을 제시하며, 또한 법이 그러한 본성을 가진다는 사실의 정치적 의미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트가 지적하듯이, 관습(custom)과 사회적 도덕(social morality)은 의도적 변경에 대해 면역을 가지며, 오직 점진적으로만 진화한다. 작고 안정된 공동체에서는 그것들이 사태를 운영하는 꽤 좋은 방식이다. 사생활의 많은 영역에서 우리가 통상 사태를 운영하는 방식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크고 복잡한 사회들은 관습들과 다른 규범들이 공적으로 확인되고, 통치자들의 말 한마디로든 다수결 투표로든 그 밖의 어떤 방식으로든 즉시 변경될 수 있게 하는, 의도적인 사회 통제 메커니즘들도 필요로 한다.

이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곧 규칙들을 식별하고, 변경하고, 집행할 권한을 가진 전문화된 기관들(specialized organs)의 출현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 결과 생겨나는 규범적 분업(division of normative labour)은 득실이 섞인 것으로서, 이득과 비용을 모두 가져온다. “그 이득은 변화에 대한 적응성, 확실성(certainty), 효율성(efficiency)이다 … 그 비용은, 중앙집중적으로 조직된 권력이, 그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는 다수자들(numbers)을 보다 단순한 일차 규칙 체제가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억압(oppression)하는 데 사용될 위험이다”(202쪽). 그러므로 법은 보편적으로 좋은 것도 아니고,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도 아니다. 법의 제도적 성격(institutional character)은 일정한 이득들을 가능하게 하지만, 또한 일정한 비용들도 가능하게 한다. 법 없는 사회라면 부담할 가능성이 낮은 비용들이다. 하트가 위에서 논한 한계 사례에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법 아래의 전형적 사회는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보다 좁은 공무담당자 합의(official consensus)에 더 의존한다.17 법의 존재가 일반 인구에게 요구하는 것은 체계의 의무부과적 규범들(mandatory norms)에 대한 묵종(acquiescence) 이상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법이 기초해 있는 합의에는 아늑하거나 공동체적인 것이 전혀 없다. 그것은 가치들에 관한 합의(agreement on values)를 전제하지 않으며, 법의 작동 속에서의 중대한 반대(dissent)를 배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왜 모든 법체계가 필연적으로 그 공동체의 가치들을 표현한다는 낭만적 믿음이 잘못인지를 보여준다. 정의롭고 가치 있는 법체계조차도 난해하고, 기술적이며, 그것이 통치하는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규범적 분업 때문에 법은 한마디로 법률주의적(legalistic)이 될 상존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모든 법이론가(legal theorist)는 법이 도덕적으로 오류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여기서 하트의 특별한 기여는, 법이 실패할 수 있는 방식들 중 일부가 사회 제도(social institution)로서의 법의 본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다.

(ii) 강제와 권력 (Coercion and Power)

법이 본질적으로 강제적 장치(coercive apparatus)라는 관념은 일반인의 견해와 공명하며, 법리학(jurisprudence)에서도 인기를 누려 왔다. 하트(Hart)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법체계(legal system)는 강제적으로 집행되지 않는 규범들(norms)을 일부 포함하며, 법체계가 전적으로 그러한 규범들로 구성될 수도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199–200쪽). 제재 없는 법(sanction-free law)의 요점은 무엇일까? 제재가 있는 법의 요점과 같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위할지를 지시하는 것이다. 제재들은 법의 플랜 B다. 플랜 A는 그 수범자들(subjects)이 추가 감독 없이 법에 부합하는 것이다. 지시의 필요는 있지만 강화 동기(reinforcing motivation)의 필요는 없는 곳에서는, 제재 없는 법들을 발견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다. 예컨대 미국 연방법전(United States Code)은 사람들에게 국기에 대한 존중을 어떻게 표시할지를 말하는 규범들을 포함한다. “국기는 어떤 것을 받거나, 보관하거나, 운반하거나, 전달하기 위한 용기로 사용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18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규범들의 위반에 대한 벌칙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인간 본성이 현재와 달랐다면, 모든 법규범들이 그와 같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 본성이 현재와 같더라도, 많은 법규범들은 제재에 의해 강화되지 않는다. 한 가지 중요한 부류는 권한부여 규범들(power-conferring norms)이다. 이는 법적 규범들과 지위들을 변경할 능력을 창출하는 법규칙들, 예컨대 사람들에게 입법하고, 법인을 설립하고, 계약하고, 혼인할 권한을 부여하는 규칙들이다. 문제되는 권한들이 자발적인 경우에는, 이 사례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사람들은 자기 선택에 따라 그것들을 행사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입법, 법인 설립, 계약, 혼인을 위한 법의 절차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하며, 그 결과 생긴 ‘혼인’은 예컨대 무효(null and void)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패했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사람은 없다. 아니면 무효(nullity) 자체가 일종의 처벌이며, 결국 이것들도 강제적 법들(coercive laws)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하트는 우리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여기에는 무언가를 하라는 명령(order)과 불복종에 대한 제재(sanction)라는 별개의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명령은 전혀 없고, 그 ‘제재’는 권한부여 규칙 자체와 다르지 않다. 켈젠(Kelsen)은 강제 이론(coercion theory)을 구하기 위한 우회로(work-around)를 제안했다. 그는 권한부여 규칙들은 실제로 법들의 파편들에 불과하므로, 그 안에서 제재가 발견되지 않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제재들은 법체계 안의 다른 곳에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배우자를 부양할 것을 요구하는 제재수반 규칙들이 있고, 혼인의 권한부여 규칙들이 하는 일은 어떤 사람에게 배우자가 있는지, 있다면 그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일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모두 강제(coercion)로 다시 연결된다. 이 움직임에 대한 하트의 응답은 시사적이다. 그는 켈젠의 재구성이 불가능하거나 비논리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동기를 결여하고(unmotivated), 법리학(jurisprudence)에 대한 방법론적 제약(methodological constraint)과 어긋난다고 말한다.

“사회 통제의 수단으로서 법의 주요 기능들(principal functions)은 사적 소송(private litigation)이나 형사 기소(prosecutions)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체계의 실패에 대비한 필수적이지만 여전히 보조적인 장치들을 나타낸다. 그 기능들은 법이 법정 밖에서 삶을 통제하고, 인도하고, 설계하는 다양한 방식들에서 보아야 한다”(40쪽).

법적 자료(legal material)를 개별 법들(individual laws)로 어떻게 나눌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본질주의적(essentialist), ‘형이상학적(metaphysical)’ 답이 없다. 최선의 접근은 법을 실제로 사용하는 이들, 그 대부분은 법정 밖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법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접근이다. 권한부여 규칙들(power-conferring rules)은 책무를 부과하는 규칙들과는 다르게 생각되고, 말해지고, 사회생활에서 사용되며, 다른 이유들로 가치 있게 여겨진다. “성격의 차이에 대한 다른 어떤 검사 기준들(tests)이 있을 수 있겠는가?”(41쪽) 이것은 하트의 방법(method)을 압축해 보여준다. 홈스(Holmes)의 ‘나쁜 사람(bad man)’에게 법은 피해야 할 비용들(costs)에 관한 전부이고, 법률가에게 법은 가능한 법정 사건들과 실제 법정 사건들, 그리고 벌어들일 법률비용(legal costs)에 관한 전부이다. 법이론들은 이러한 외눈박이(cyclopic) 관점들로부터 뽑혀 나왔다. 그것들은 현실적이지만 주변적인 것을 마치 중심적인 것처럼 취급한다. 법적 중요성의 온전한 차원들이 그들의 평면적이고 환원적인 그림들에서 빠져 있다.

거기까지는 모두 옳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 통제의 수단으로서 법의 주요 기능들’ 모두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면, 여기서 하트가 나아간 것보다 더 멀리 가야 한다. 권한부여 규칙들을 책무부과 규칙들(duty-imposing rules)로 환원하려 하거나, 무효(nullity)를 일종의 제재로 표상하려 하는 것은 기실 잘못이다. 그러나 권한부여 규칙들이 사회적 권력(social power)과 결부되어 있는 방식들을 알아차리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애초에 왜 강제(coercion)에 관심을 가지는가? 한 가지 대답은 책임(responsibility)과 연결되어 있다. 위협(threat)에 의해 어떤 일을 하도록 강제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했다는 책임을 지지 않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들의 의지가 압도(overborne)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법적 벌칙들(legal penalties)은 그렇게 엄중하지 않다. 지속적으로 그것들을 지급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는 제외한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유인들(incentives)에 영향을 미치며, 이는 권한부여 규칙들의 경우에도 참이다. 강제(coercion)는 법의 권력(law’s power)의 단단한 가장자리(hard edge)이다. 법규범들의 유인적(incentivizing) 성격과 표현적(expressive) 성격은 그 부드러운 가장자리(soft edge)에 속한다.

혼인할 권한(power to marry)을 부여하는 규칙들을 다시 생각해 보라. 그것들은 조건 아래에서 그렇게 한다. 예전에는, 그리고 어떤 곳들에서는 지금도, 이러한 조건들 안에 누구와 혼인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인종 또는 성별 제약들(restrictions)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인종의 사람들 사이의 혼인이나 같은 성별의 사람들 사이의 혼인은 법적 무효(legal nullities)였다. 이제 하트가 제시하는 이유들 때문에, 이것을 사람들을 이성애적 또는 동일 인종적 관계로 강제하는 일종의 강제로 보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누구도 혼인할 필요는 전혀 없다. 따라서 이러한 법들은 동성애 행위에 대한 형사처벌들이나 도망노예법들(fugitive slave laws)과 같지 않았다. 그래도 해당 권한부여 규칙들, 또는 권한부여 규칙들과 해석 규칙들의 결합이 이러한 혼인들을 무효(void)로 만든 것은 우연도 의도되지 않은 부산물도 아니었다. 그것이 그 규칙들의 목적이었다. 명령들(orders)과 제재들(sanctions)만큼 조악한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법들은 개인들의 삶과 공동문화를 형성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트가 호의적으로 ‘편의들(facilities)’을 제공한다고 부르는 규칙들의 기능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모든 법들이 강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비강제적 법들도 강제적 법들이 하는 일을 한다. 그것들은 사회적 권력(social power)을 표현하고 통로화한다(channel). 그것들은 그 내용(content)을 통해서도, 더 일반적인 특징들을 통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예컨대 자발적 권한들(voluntary powers)은 자기 의지를 행사할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 법적 통제를 배분하고, 개인적 권한들(individual powers)은 그것을 개인들에게 배분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강제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한 법들을 창설하고 적용하는 이들에 의해 예측 가능할 뿐 아니라 흔히 의도되는 방식으로 사회 세계(social world)를 형성한다.

4. 법과 도덕 (LAW AND MORALITY)

이 책의 중심 문제 중 하나는 법과 도덕 사이의 다형적 관계들(pluriform relations)—관습적, 또는 ‘사회적’ 도덕(social morality)과 이상적, 또는 ‘비판적’ 도덕(critical morality) 양쪽—에 관한 것이다. 하트는 법과 도덕 사이에 어떤 종류의 분리(disjunction)가 존재한다고 고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이론에 대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역사적인 홈즈 강연에서 말했듯이, “법과 도덕규범들 사이에는 필연적 연결이 없다(no necessary connection between law and morals)”고 본다는 점은 안다.19 우리는 이미 위의 3 (i)에서, 법이 그 법이 지배하는 인구가 실제로 지지하는 도덕적 가치들을 반드시 반영할 필요는 없는 이유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을 마땅히 지배해야 할 도덕적 가치들은 어떤가? 하트는 여기에도 필연적 연결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법의 개념(The Concept of Law)』에서 그는 때때로 그 생각을 다르게 정식화한다. 한 지점에서 그는 실증주의의 핵심 명제를, “법들(laws)이 도덕의 특정 요구들을 재현하거나 충족시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필연적 진리가 아니다”(185–6쪽)라고 보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더 좁은 주장처럼 보인다. 모든 법들이 건전한 도덕 기준들을 ‘재현하거나 충족시킬’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법과 도덕 사이에 필연적 관계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트의 첫 번째이자 더 넓은 정식화는, 법이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그의 견해를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서조차 거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20 법과 도덕이 모두 인간 행위를 규율한다는 것이 단지 우연적 사안일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규범들의 체계라면, 그 규범들은 법적 규범들도 아니고 도덕적 규범들도 아닐 것이다. 이것은 법과 도덕 사이의 하나의 필연적 연결을 시사한다. 그리고 다른 연결들도 있다. 사실 하트의 성숙한 이론은 법과 도덕 사이의 두 가지 더 흥미로운 필연적 연결을 실제로 인정한다. 하나는 법의 목적을 경유하고, 다른 하나는 법과 정의 사이의 상정된 연결을 경유한다. 또한 하트의 이론은 많은 다른 실증주의자들이 인정하기를 꺼리는 법과 도덕 사이의 우연적 연결도 허용한다. 이 세 가지 주장들은 분리 명제의 어느 버전 못지않게 하트의 이론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중 명확하게 옳은 것은 첫 번째 주장뿐이다.

(i) 법의 목적 (Law’s Purpose)

법은 단순한 규칙들의 체계가 아니라, 여러 목적들에 봉사하는 체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법이 또한 전체적 목적(overall purpose)을 가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주장하기로 법은 “공동선을 위해 마련된 이성의 규율(an ordinance of reason made for the common good)”이기 때문이다.21 이 노선의 현대적 제안들에는, 법이 행위를 인도하기 위해, 또는 공동선을 위해 활동을 조정하기 위해, 또는 정의를 행하기 위해, 또는 강제를 허가하기 위해 만들어진다는 관념이 포함된다.22 이러한 주장들은 법에 대한 가능한 이상들에 관한 제안들이 아니라, 법의 구성적 목적들(constitutive aims)에 관한 주장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본 관념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목적들을 가지지 않는 사회적 통제 체계는 법체계가 아닐 것이며, 이는 지식 추구를 지향하지 않는 기관이 대학이 아닐 것인 것과 같다. 구성적 목적들을 가진다는 것만으로는 도덕과의 어떤 연결도 확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목적들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어떤 기구도 설거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식기세척기가 아니며, 설거지 능력은 식기세척기가 좋은지 판단하는 주요 기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설거지는 보통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활동이 아니므로, 좋은 식기세척기가 도덕적으로 좋은 식기세척기인 것은 아니다. 법의 구성적 목적에 관한 위 제안들은 도덕적 하중을 지닌 것에서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까지 다양하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선하고, 행위 인도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며, 강제를 허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양의적이다.23

도덕과의 연결은 또한 구성적 목적이 얼마나 성공하는지에 달려 있다. 제9장에서 하트의 논증은 인간 생존이 도덕적으로 선하며,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 규범 체계는 법체계가 아닐 것이라고 가정한다. 또한 법체계가 존재하려면, 모두에게 항상은 아니더라도 일부 사람들에게 많은 시간 동안은, 소기의 성과를 실제로 내야 한다(deliver the goods)고 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 구성적 목적을 가진 어떤 것은 우리가 그것을 관련 종류의 구성원으로서 실격시키기 전에 상당한 여지를 얻는다. 결함이 있거나 고장 난 식기세척기도, 수정되거나 수리된다면 설거지를 할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질 것이라면 여전히 식기세척기이다. 법체계들에도 마찬가지이다. 법들이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데 매우 결함이 있는 통일된 법들의 집합들도 그럼에도 법체계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무언가를 지향한다(aim)는 것이 그것에 성공한다(succeeding)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따라 나온다.

이 문제에 대한 하트의 마지막 성찰들에서 그는 더 이상 법이 생존을 지향할 필요조차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는 법이 어떤 종류의 흥미로운 구성적 목적도 가진다는 점을 부정하는 막스 베버(Max Weber)와 한스 켈젠(Hans Kelsen)에 합류한다. (켈젠은 “법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 특정한 사회적 수단이다(Law is a means, a specific social means, not an end)”라고 말했다.24) 하트는 이렇게 쓴다. “나는 법이 그 자체로 인간 행위에 지침들을 제공하고 그러한 행위에 대한 비판 기준들을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봉사하는 더 구체적인 목적을 찾는 것은 매우 헛되다고 생각한다”(249쪽). 여기에는 생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어쩌면 하트는 법이 생존을 촉진하는 목적이나 다른 목적들을 가진다는 자신의 이전 주장을 철회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그는 법이 그러한 목적들 중 어떤 것에 의해서든 식별될 수 있다(identified)는 점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법체계들 사이에서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법체계들에 고유한 목적은 없다는 말이다. 법은 생존을 촉진하려는 목적을 가질 수 있고, 행위를 인도하고 평가하려는 목적을 가질 수 있다. 어느 것도 법을 관습, 종교, 도덕 같은 것들로부터 구별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것들은 중첩 지점들이다. 법과 도덕은 유사한 과업들에 주목하고, 관련된 이유들로 그렇게 하며, 일부 유사한 기법들을 사용한다.

(ii) 법과 정의 (Law and Justice)

제8장에서 하트는 법과 도덕 사이의 놀라운 연결을 옹호한다. 그의 논증은, 둘 모두에서 같은 사례들은 같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통해, 규칙-따르기(rule-following)를 정의(justice)와 결부시킨다. 실천 이론(practice theory)에 따르면, 일반 규칙들(general rules)은 사람들이 그 규칙들에 어느 정도 항구성을 가지고 부합하거나(conform) 그 규칙들을 적용하지 않는 한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하트는 항구성(constancy) 자체가(itself) 일종의 정의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가장 혐오스러운 법조차도 정의롭게 적용될 수 있지만], 일반 법규칙을 적용한다는 기본 관념(bare notion) 안에는 적어도 정의의 씨앗(germ of justice)이 담겨 있다”(206쪽, cf. 160쪽). 그렇다면 이로부터 모든 존재하는 법체계는 일정한 정의를 행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물론 ‘실체적(substantive)’ 정의는 아니다. 혐오스러운 법을 꾸준히 적용하는 것은 그 혐오스러움을 어떤 식으로도 보상하거나 완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적용은 그럼에도 법의 적용(application)에서의 정의, 또는 어떤 이들이 말하듯 ‘형식적(formal)’ 정의를 산출한다.25 이것은 어떤 법이, 그 법 아래에서의 대우에 관련성이 있다고 그 법 자체가—옳든 그르든—간주하는 방식에서 같은 이들 모두에게, 그리고 오직 그들에게만 적용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요건은 모든 법을 포괄한다. ‘극도로 억압적인(hideously oppressive)’ 법들, 또는 ‘권리 없는 노예들(rightless slaves)’에게 작동하는 어떤 법체계의 최소한의 혜택조차 부정하는 법들까지도 포괄한다.26

나는 법이 얼마나 나쁠 수 있는지를 두고 하트가 쓴 말들(‘혐오스러운(odious)’, ‘극도로 억압적인(hideously oppressive)’ 등)을 인용했다. 그의 ‘정의의 씨앗(germ of justice)’ 논제가 대담한 논제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적용에서의 항구성은, 단지 가벼운 정도로만 부정의한 법들을 생각하고 있다면 일리 있게 보일 수 있다. 예컨대 그 정당화 목적들에 비추어 과포괄적이거나 과소포괄적인 법들이다. (17세 미만 누구에게나 운전을 금지하는 규범은 어떤 이들 중 너무 적은 사람에게, 다른 이들 중 너무 많은 사람에게 운전을 허용한다.) 그러나 완전성은 얻을 수 없고, 작은 방식으로 미달하는 법들을 확고하게 적용할 이유들은 많다. 그러나 그것은 하트의 논지를 입증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것이 혐오스러운 법들에도 적용되며, 우리가 실체적 정의—또는 형평성(equity), 자비(mercy), 제정신(sanity)—가 이기게 할 때조차, 그 과정에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잃었다는 인식 속에서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적어도 하나의 측면에서는 부정의했다.

‘형식적(formal)’ 정의라는 이 관념에는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 결국, 정의의 형식(the form of justice)을 가진 모든 것이 정의의 형식(a form of justice)인 것은 아니다. 낙타의 형식(the form of a camel)을 가진 모든 것이 낙타(a camel)인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더 나쁘게도, 정의 규범들(norms of justice)과 부정의 규범들(norms of injustice)은 그 형식들에서 다를 필요가 없다.27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가치의 노동에 대해 동일한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규범은 정의 규범이다.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가치의 노동에 대해 서로 다른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규범은 부정의 규범이다. 그 둘은 같은 형식을 가진다. “모든 규칙을 그것이 포괄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리고 오직 그들에게만 적용하라”는 규범은 어떠한가? 그것은 “이미 친구로 삼기로 결정한 사람들 모두와, 그리고 오직 그들과 친구로 지내라”와 같은 형식을 가진다. 두 번째 것은 정의의 규범인가? 한 규범이 정의의 규범인지, 부정의의 규범인지, 또는 둘 다 아닌지를 그 형식만을 근거로는 알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간통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은 여성을 돌로 쳐 죽이는 방식으로 처벌하도록 되어 있는 법체계에서 일하는 판사의 사례를 상상해 보자. 이 법을 그 법이 포괄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이유가 있는가? 특별한 사례들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의 생명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거부하면 폭동과 더 많은 여성들의 살해를 야기할 수 있으며, 그는 한 경우에 그것을 적용하여 다른 경우에 그것을 더 효과적으로 공격할 만큼 충분한 신뢰를 확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법의 적용에서 모든(all) 경우에 확고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법률 없이는 형벌 없다(nulla poena sine lege)라는 원칙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 원칙은 법을 위반하지 않은(have not) 사람들을 처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 조건은 우리의 가설적 사례에서 충족된다. 그러나 그 원칙은 법을 위반한(has) 모든 사람을 처벌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부정의일 것인가? 그렇다면 누구에게? 돌로 맞아 죽을 다른 유죄 여성들이나, 이미 그렇게 죽은 여성들의 가족들이, 다른 모든 유죄 여성도 똑같이 혐오스럽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

하트는 아마도 ‘형식적(formal)’ 정의를 두 가지 건전하지만 관련 없는 관념들과 혼동하고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결과들뿐 아니라 절차들(procedures)에도 정의와 부정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법적 분쟁에서 양 당사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자연적 정의(natural justice)의 요건이다. 그것을 보장하지 않는 절차는 부정의하다. 그러나 부정의한 규칙 자체(itself)가 자연적 정의의 위반을 규정할 수 있다. 법이 부유한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들보다 자기 사건을 제시할 시간을 두 배 허용한다면, 그 법의 엄격한 적용은 자연적 정의를 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후퇴시킬 것이다. 이 근방의 다른 관념은 우리가 규칙들을 적용할 때 불편부당(impartial)해야 하며, 판단하는 이들은 ‘편견, 이해관계, 또는 변덕(prejudice, interest or caprice)’에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61쪽). 그것도 옳다. 그러나 부정의한 법을 그 규정 내용에 따라 적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그런 동기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혐오스러운 법 자체가 편견에 따른 것이거나 변덕스러운 것일 수 있고, 그것을 선택적으로 적용하지 않는 일은 최선의 동기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트의 ‘정의의 씨앗(germ of justice)’ 논제로부터 우리가 무엇인가를 건져낼 수 있는가? 어쩌면 이것일 수 있다. 일단 우리가 규칙-적용(rule-application)에 조율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규칙들이 특정 사례들에서(in particular cases)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다. 곧 사람들이 그 규칙들 아래에서 처지가 어떠한지 또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주의를 총량적 물음들(aggregative questions)에만이 아니라 분배적 물음들(distributive questions)에 맞춘다. 그것은 요즘 충분한 처벌이 내려지고 있는지를 묻는 데 그치지 않고, 올바른 대상자들이 올바른 방식으로 올바른 범죄행위들에 대해 처벌되고 있는지를 묻도록 요구한다. 혜택과 부담이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정의의 물음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A가 A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았는지, 또는 A와 B 사이의 대우 차이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주의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정의에 대한 관심이다. 법원과 같이 그러한 물음들을 검토하고 처리할 권한을 가진 제도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정의를 행할 수 있는 제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부정의도.) 어쩌면 크고 복잡한 사회에서는 그러한 제도들 없이는 정의가 행해질 수 없을 것이다.

법과 도덕 사이의 세 번째 접점은 다르다. 하트는 도덕 원칙들(moral principles)이 반드시 법의 원천인 것은 아니지만, 법의 원천인 것들에 의해 그렇게 권위를 부여받는다면 법의 원천이 될 수 있다(could)고 인정한다. 이를 표현하는 한 방식은, 하트가 승인 규칙(rule of recognition)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구성물(social construction)이지만 그것이 동원하는 기준들(criteria)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도덕 원칙들이 가치 있는 원칙들이기 때문에 또는 현존 법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법 안에 넣어진다면, 그것들은 법이 될 수 있다.

여기서 하트는 구성주의 논제(constructivist thesis)를 해석하는 두 방식 가운데 하나에 관해, 흔히 ‘포괄적(inclusive)’ 법실증주의라고 불리는 입장에 찬성하고, 법의 원천들(sources of law)은 이상적 도덕(ideal morality)의 원칙들을 포함할 수 없다고 보는 ‘배타적(exclusive)’ 법실증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28 그가 이 결론에 이르는 경로는, 부분적으로 그가 본문을 썼을 때에는 이러한 대안들이 아직 구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되짚어가기 어렵다. 그러나 후기(Postscript)에서 그의 결론은, 법적 유효성(legal validity)이 순전히 어떤 규범(norm)의 ‘계보(pedigree)’, 곧 “법들이 법제도들(legal institutions)에 의해 채택되거나 창출되는 방식에만 관련되고 그 내용(content)과는 관련되지 않는” 특성들의 문제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247쪽).29 대신 법적 유효성은 도덕적 적절성(moral propriety)에 좌우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포괄적 실증주의 논제 자체를 평가할 수 없다.30 그러나 하트가 이 논쟁에 가져온 하나의 혼동을 걷어내려 시도할 가치는 있다. 승인 규칙 안의 기준들이 도덕 원칙들을 포함할 수 있는지라는 질문은, 이 기준들이 계보의 문제들인지라는 질문과 같지 않다. ‘계보(pedigree)’와 가능한 대비는 두 가지가 있다. 실체(substance)와의 대비가 있고, 도덕(morality)과의 다른 대비가 있다. 혼동이 지배하는 것은 ‘실체적(substantive)’이라는 말을 ‘정당화된(justified)’ 또는 ‘도덕적(moral)’이라는 뜻으로 쓰는 흔한 습관 때문이다(위 4 (ii)에서 ‘실체적 정의(substantive justice)’라는 관념에서 보았듯이). 본문에서 하트는 모든 법체계가 법적으로 무제한적인 권한을 포함한다는 오스틴(Austin)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도입한다. 오스틴주의자는 아마 주권적 입법자가 자신이 입법하는 ‘방식과 형식(manner and form)’에 관해서는 제한될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특별한 고지와 토론의 요건들, 또는 특별다수 의사결정에 종속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성문헌법들에는 그런 식으로 특징지을 수 없는 제약들도 있다. 그것들은 “특정 사안들을 그 입법 권능의 범위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그리하여 실체적 제한들(limitations of substance)을 부과한다”(68쪽). 그것들은 “단지 도덕적이거나 관행적인 것이 아니라 법적인” 무능력들(disabilities)을 부과한다(69쪽).31 하트는 그 예로 미국 헌법 제16차 수정조항을 제시하는데, 그 일부는 “개인 인두세(capitation tax) 또는 기타 직접세(direct tax)는, 앞서 지시된 인구 조사 또는 산정에 비례하지 않는 한, 부과될 수 없다”고 요구한다. 그것은 분명히 방식-및-형식 요건이 아니므로, 한 의미에서는 실체적이다. 그러나 하트는 또한 “미국에서처럼 일부 법체계들에서는, 유효성의 궁극적 기준들이 계보 이외에도 정의의 원칙들이나 실체적 도덕 가치들을 명시적으로 편입할 수 있고, 이것들이 법적 헌법 제약들의 내용을 형성할 수 있다”(247쪽)고 말한다. 이것은 ‘실체적’이라는 말의 다소 다른 관념이다. 가능한 승인 규칙의 다음 단편들을 비교해 보라.

(S1) 의회는 국교를 설립하는 어떤 법도 제정할 수 없다.

(S2) 의회는 불공정한 법을 제정할 수 없다.

(P1) 의회는 은밀하게 법을 제정할 수 없다.

(P2) 의회는 불공정한 방식으로 법을 제정할 수 없다.

규칙 (S1)과 (S2)는 유효성의 실체적 기준들(substantive criteria of validity)을 설정하고, (P1)과 (P2)는 절차적 기준들(procedural criteria)을 설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도 짝지을 수 있다. (S2)와 (P2)는 유효성의 도덕적 기준들(moral criteria for validity)을 설정하는 반면, (S1)과 (P1)은 사실적 기준들(factual criteria)을 설정한다. (이것은 그 기준들이 완전히 확정적인 기준들을 설정한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법이 종교를 설립하는지 또는 비밀리에 만들어졌는지는 둘 중 어느 것을 하는 것의 적절성(propriety)에 관해 어떤 견해에도 이르지 않고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묻는다. (P2)도 계보 검사 기준(a test of pedigree)을 진술하는가? 그것은, 그것을 적용하려면 결국 채택된 법의 내용이 아니라 그 법이 채택된 방식을 검토한다는 의미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P2)가 충족되는지 여부(whether)를, 그것이 만들어진 방식의 도덕적 적절성(moral propriety)에 관해 결정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계보(pedigree) 은유는 오도할 가능성이 크며, 우리는 그것을 버리고 사회적 사실의 사안들과 도덕 판단을 요구하는 사안들 사이의 구분을 채택해야 한다.

사안들은 세 가지 다른 것들로 인해 더 복잡해진다. 첫 번째는 동음이의(homonymy)이다. 헌법이나 그 밖의 곳에 도덕적으로 들리는 용어들(terms)이 있다는 사실은 법에 대한 도덕적 검사 기준들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기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한 용어들 중 일부는 법적 맥락에서 특수한 의미를 가지거나 가지게 되었는데, 그 의미는 관습적 도덕(customary morality), 사법적 결정들(judicial decisions), 법적 해석의 전통들에 의해 통제되는 의미이다.32 “모든 개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고 말하는 헌법은 평등이라는 도덕적 이상에 손을 뻗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법원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규정이 도덕적 이상을 진술하면서 그 헌법적 생애를 시작하더라도, 사법적 결정들은 그것을 불평등의 사실적 전형들(factual paradigms) 및 불평등에 대한 다갈래 교의적 검사 기준들(multi-prong doctrinal tests)로 뒤덮을 수 있다. 이것들은 법의 유효성에 대한 통상적인 원천 기반 검사 기준들(source-based tests)이다. 그것들은 원래의 추상적 도덕 이상으로부터 너무 멀어져서, 그것이 여전히 작동 중인지조차 불분명할 수 있다.

두 번째 복잡성은 속존(supervenience)이다. 예컨대 어떤 것이 ‘불공정하다(unfair)’면 그것을 불공정하게 만드는 사실들, 곧 그것이 불공정한 덕분이 되는(in virtue of which) 사실들이 있으며, 하나의 배열은 불공정하고 다른 배열은 공정하려면 이러한 사실들에도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럴듯하다. 어떤 헌법이 차별적인 제정법들(statutes)을 금지한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차별(discrimination)이 도덕적으로 그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이 통상적 사회적 사실들—예컨대 결정이 내려질 때의 의도에 관한 사실들, 또는 그 결정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상대적 영향에 관한 사실들—덕분에 그른 것이라면, 이러한 사실들은 어느 견해에서든 법에 대한 검사 기준의 일부일 수 있다. 배타적 실증주의는 법에 대한 궁극적 검사 기준들이 어떤 것을 공정하거나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논거에서 언급될 수 있는 사실들을 전혀 포함하지 않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관련 사실들을 그러한 도덕적 속성들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견해에 이르지 않고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만 요구한다.

세 번째 복잡성은 불확실성(uncertainty)이다. 하트는 입법부가 어떤 산업에 그 서비스에 대해 오직 ‘공정한 요금(fair rate)’만 부과할 것을 요구하는 사례를 검토한다(131–2쪽). “필수 서비스에 대해 공중을 인질로 잡는 것과 같은 높은 요금”(131쪽)처럼 입법에 의해 분명히 고려되었을 만큼 명백한 불공정의 몇몇 극단적 사례들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특정하려 시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현명하지도 않을 다른 많은 사례들이 있을 것이다.

이 경우들에서, 규칙제정 권위기관(rule-making authority)은 재량(discretion)을 행사해야 함이 분명하며, 다양한 사례들이 제기하는 물음을 하나의 유일하게 올바른 답이 찾아질 수 있는 것처럼, 곧 많은 상충하는 이해관계들 사이의 합리적 타협인 답과 구별되는 답이 있는 것처럼 다룰 가능성은 없다(131–2쪽).

그렇다면 적어도 ‘공정성(fairness)’이 불확실한 정도에서는, 제정법 안에서 이 용어에 대한 참조(reference)는 법원들이 재량(discretion)을 행사할 것을 요구한다. ‘공정한 요금(fair rate)’을 명하는 입법자는 이 점을 알고 있을 것이며, 법원들에게 재량적 권한(discretionary power)을 부여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법원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권한이 아니라, 무엇이 불공정한지를 판정하고 그들의 판정(determination)이 구속하도록 할 권한이다. 후기(Postscript)에서는 그림이 달라 보인다. 여기서 ‘적법절차(due process)’, ‘평등(equality)’ 등을 참조하는 헌법 규정들은 도덕 원칙들(moral principles)이 법 안으로 편입되는 사례들로 제시된다. 그것들이 재량을 부여하는지 여부는 이제 그 불확실성의 정도가 아니라, 그것들에 관한 분쟁들을 해소하는 데 필요할 도덕 판단들이 ‘객관적 지위(objective standing)’를 가지는지 또는 가지지 않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해진다(253–4쪽). 도덕 판단들이 객관적이라면,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판정들은 도덕 기준들을 참조하는 이미 존재하는 법(pre-existing law)을 적용할 뿐이다. 도덕 판단들이 객관적이지 않다면, 이것들은 “법원들에게 도덕에 따라 법을 만들라(make law)는 지시들을 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254쪽). 하트는 법리학(jurisprudence)이 논쟁적인 메타윤리 이론들(meta-ethical theories)에 대한 약속들을 피하기를 원하므로, 그 물음을 열어둔다.

만약 이것이 헌법들 안의 도덕적 언어가 제정법들 안의 도덕적 언어와 다르게 기능한다고 넌지시 암시한다면, 그것은 동기가 부족해 보인다. 성문헌법(written constitution)은 결국 특수한 종류의 제정법일 뿐이다. 제정법에서는 ‘공정성(fairness)’에 대한 참조가 적어도 공정성이 무엇을 요구하는지가 불확실할 때 재량적 권한을 부여한다고 보면서, 헌법에서는 예컨대 ‘근본적 정의(fundamental justice)’에 대한 참조가, 그것이 무엇을 요구하는지가 불확실할 뿐 아니라 그 불확실성의 도덕적 해소가 ‘객관적(objective)’이지 않을 때에만 재량적 권한을 부여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 해소를 달성하는 데 동원될 원칙들의 지위와 무관하게, 해소가 요구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헌법적 기본원칙들의 경우에는 단순한 제정법의 경우보다 재량이 더 걱정스럽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재량이 부재한다는 점을 보여주지 않는다. 게다가 재량은 전부-아니면-무의 사안(all-or-nothing affair)이 아니다. 사실 기반 기준들(fact-based criteria)은 재량적 판정들을 부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켈젠(Kelsen)의 은유에서처럼, 그 판정들이 부합해야 하는 ‘틀(frame)’을 제공함으로써뿐 아니라, 이런저런 종류의 판정들에 대한 비확정적 이유들(non-conclusive reasons)로서도 그럴 수 있다.33

하트가 자신의 입장을 위한 논변에 가장 가까이 이르는 곳은 다음이다. 그는 넓은 도덕적 적절성(moral propriety)을 법에 대한 검사 기준(test for law)으로 삼는 가상의 헌법을 검토한다. 어떤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르거나, 부정의하거나, 불공정하다면, 어떤 것도 법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이것에 논리적으로 잘못된 점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비범한 장치에 대한 반대이유는 ‘논리(logic)’가 아니라 그러한 법적 유효성 기준들의 극심한 불확정성(gross indeterminacy)일 것이다. 헌법들은 이런 형식을 취함으로써 문제를 초대하지 않는다.”34 그러나 ‘논리(logic)’가 개념적 논변(conceptual argument)을 포함한다면, 그러한 반대이유가 있을 수 있다. 조셉 라즈(Joseph Raz)는, 이것은 단지 문제를 초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주장하는 종류의 권위를 가지는 것과 양립 불가능할 것이라고 논변한다.35 모든 법은 정당한 권위를 주장하며,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일 때에만 그렇게 일관되게 할 수 있다. 법의 주장은 공허할 수 있고(hollow), 불성실하거나 부정의하거나 지혜롭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 가능해야 한다(intelligible). 법체계들을 포함한 실천적 권위들(practical authorities)의 역할은 사람들이 그들이 할 이유가 있는 것에 부합하도록 돕는 것이다.36 권위들은 자신들의 지시들(directives)을 그 이유들에 기초시킬 때, 그리고 그들의 지시들을 따르려 시도하는 일이 수범자들이 그들에게 적용되는 기저 이유들(underlying reasons)이 요구하는 바를 준수할 개연성을 더 높일 때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시, 지시들이 바로 그 이유들에 대한 호소와 독립적인 방식으로 식별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기 위해 먼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내야(figure out) 한다면, 법은 누구에게도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 제정법은 사람들에게 서로 공정하게 거래하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더 공정한 결과들을 확보할 수 없고, 헌법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더 평등한 사회를 산출할 수 없다. 권위 있는 지시(authoritative direction)를 제공하려면,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들이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말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라즈의 논변이다. 이것은 분석법리학(analytical jurisprudence)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논변들 중 하나이다. 그 안에는 많은 단계들이 있고 그중 몇몇은 논쟁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트가 이용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종류의 논변이며, 우리가 하트의 견해에 동의하기 전에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37

포괄적 법실증주의(inclusive legal positivism)는 도덕(morality)이 법적 논증에서 적절하게 역할을 찾을 수 있으려면 그렇게 하도록 초대되어야 한다고 시사하는 듯하다. 하트는 유효성의 궁극적 기준들(ultimate criteria of validity)을 통해 초대장을 발한다.38 그러나 초대장이 정말 필요한가?39 누구도 판사들이 논리적 추론(logical inference)의 원리들이나 단순 산술(simple arithmetic)에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법이 이 원리들을 특별히 안으로 초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도 영어 문법의 규칙들이 영국법의 승인 규칙(rule of recognition) 안에 자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결국 초대장은 필요하지 않을 수 있고, 도덕 원칙들은 이러한 다른 기준들처럼 이미 법원 안에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하트는 존재하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안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5. 사실, 가치, 방법 (FACT, VALUE, AND METHOD)

하트(Hart)는 서문(Preface)에서 이 책의 목적이 “법(law), 강제(coercion), 도덕(morality)을 서로 다르지만 관련된 사회적 현상들(social phenomena)로서 이해하는 일을 증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법률가들이 이 책을 “분석법리학(analytical jurisprudence)”의 한 작업으로 볼 것이라고 예측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법이나 법정책(legal policy)에 대한 비판보다는 법적 사고(legal thought)의 일반적 틀을 명료화(clarification)하는 일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이 책을 “기술적 사회학(descriptive sociology)의 한 에세이”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vi). 우리는 이 발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i) 법리학과 사회학 (Jurisprudence and Sociology)

현장조사도, 통계모형도, 심지어 법 사례들도 거의 제시하지 않는 이 책은 묘한 종류의 사회학이다. 하트는 나중에 돌아보며, 이 책이 사회학의 한 종류(kind)라고 시사하기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사회학을 위한 예비작업(preparatory)이라고 말했어야 했다고 한다40. 이 다섯 단어는 그럴 만한 것보다 더 많은 골칫거리를 낳았다. 그 요점은 단지 하트의 방법이, 기술적 사회학의 방법들과 마찬가지로(like), 사실들(facts)에 대해 책임을 지되 그것들에 관해 어떤 도덕적 또는 정치적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는 법철학의 주장들(claims)을 검사할 때 법 세계에 관해 식견 있는 사람이 가진 지식을 사용하라고 독자에게 거듭 호소한다. 정말 법규칙들(legal rules)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보라(136). 모든 법체계가 무제한적 주권자(illimitable sovereign)를 가지는가? 보라. 선험적(a priori) 이론과 법에 대한 일상적 지식 사이에 충돌이 있다면, 후자를 택하라. 그것은 수정이 필요할 수 있고, 아마 규율도 필요할 것이지만, 출발해야 할 곳이다. 이 책의 경험적 기반(empirical basis)은 그보다 더 정교하지 않다. 그러나 기술적 사회학처럼 이 책에도 경험적 기반이 있다. 이 책은 정의(definitions)나 공리(axioms)에서 시작하여 법에 대한 필연적 진리들을 도출한다고 자처하지 않는다. 법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도덕적 주장들에서 시작하여 법이 실제로 어떠한가에 관한 결론을 추론하지도 않는다.

기술적 사회학은 그 관찰들(observations)의 양과 질에서 일상적 지식을 넘어선다. 그것은 종종 그 관찰들을 일반화들로, 또는 더 야심차게는 예측들로 조립하려 한다. 하트는 둘 중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기본적인 것들을 가지고 작업한다. 그는 법의 본성에 관한 하나의 이론을 제시하며, 그 이론은 다른 영향력 있는 이론들과 달리 그러한 것들과 일관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론은 사회-법적 데이터의 바다를 훑어 건져 올린 일반화들의 집합이 아니며, 아무것도 예측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어떻게 가치를 더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함으로써이다. 그것은 일상적 사실들 사이의 놀라운 관계들, 그 사실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전제들(presuppositions), 그리고 특히 특정 사실들의 더 넓은 의의를 보여준다. 물론 설명(explanation)과 이해(understanding) 사이에 뚜렷한 단절은 없다. 법사회학과 법철학의 풍부한 연구들은 양쪽 일을 얼마간씩 수행한다. 이해는 법에 대한 설명적 탐구나 예측적 탐구의 경쟁자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를 규율한다고 자처하는 허가 체계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의 일이다.

이것은 분석적 법리학(analytic jurisprudence)과 법사회학이 대체로 병행해 진행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첫째가 때로 둘째에 대한 예비작업이 될 수 있다는 하트의 시사에 대해 어떤 논거가 성립할 수 있을까? 켈젠(Kelsen)은 “[사]회학적 법리학(sociological jurisprudence)은 법의 법리학적 개념(juristic concept of law), 곧 규범적 법리학(normative jurisprudence)이 정의하는 법 개념을 전제한다”고 말했다41. 그의 기본 관념은, 사회학이 법제도들과 법적 실천들을 연구하고 그것들에 관해 일반화하려 하는 한, 그것들에서(with them)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권한부여 규칙들(power-conferring rules)의 사회적 결과들에 관심이 있다면, 어느 것들이 그런 규칙들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규범적 법리학’이 필요하다. 또는 다른 예를 들 수 있다. 사회학자들은 법의 지배(rule of law)에 대한 실증적 측정치들(empirical measures)을 개발하려 한다. 이것들이 그 대상에 대한 타당한(valid) 측정치들인지 알려면, 우리는 법의 지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알기로, 주요 지표들(leading indices) 가운데 어느 것도 특정 관할권에서 법들(laws)이 소급적이지도, 모호하지도, 서로 충돌하지도 않는 정도를 추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법의 지배의 중심적 요건들이다42. 그러나 그중 일부는 여러 관할권에서 사유 재산의 보장이나 계약 자유를 추정하고, 그러한 요소가 더 많은 곳에 더 높은 법의 지배 점수를 부여한다. 이것은 명백한 정치적 편향을 드러내며, 또한 개념적 혼란의 신호이기도 하다. 법의 지배 개념(concept)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그것이 ‘자본주의의 전제 조건들’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관념(idea)을 매우 빈약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적어도 이러한 실증적 측정치들은 신뢰할 수 있고, 관심 변수들과 상관관계가 있으며, 법과 사회에 관해 우리가 가진 다른 지식들과 연속적이라고 답할 수도 있다43. 그렇더라도 법사회학이 관련 개념들이 골라 지목하는 핵심에서 너무 멀리 표류하면, 그것은 주제를 바꾼 것이다. 어떤 주제들은 바뀔 필요가 있을 수 있다. 자연과학의 진보는 때때로 하나의 존재론을 찢어 버리고 다시 시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진보가 규칙들, 책무들, 권한들, 법원들 등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친숙한 법적 존재론, 또는 법의 지배 같은 친숙한 법적 가치들을 찢어 버릴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법 아닌 것의 사회학이 될 것이다. 이것은 법리학(jurisprudence)에 어느 정도의 우선성(priority)을 준다.

우리가 ‘법의 법리학적 개념(juristic concept of law)’과 관련 개념들을 붙들고 가려 한다면, 하트가 약속하는 더 깊은 이해를 우리는 어떻게 얻는가? 어디서 시작하는가? 하트는 종종 우리가 어떤 것들을 어떻게 판단하거나 분류할지를 묻는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적 지식을 이끌어내려 하며, 때로는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할(say) 것인지를 묻는 방식으로 그 일(that)을 한다. 이것이 그의 법리학을 의미론(semantics)의 한 분과로 만드는가? 하트는 철학에서의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에 영향을 받았고, 스스로도 그 주창자라고 보았다44. 그의 특유한 경로는 옥스퍼드에서 동료들인 J. L. 오스틴(J. L. Austin)과 길버트 라일(Gilbert Ryle)이 발전시킨 일상 언어철학의 영향을 받았다45. 그럼에도 이 책의 시대와 출처를 고려할 때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법의 개념(The Concept of Law)』에 언어분석이 얼마나 적은지(little) 이다. 우리는 언어가 다양한 기능들을 가진다는 것, 문장들이 맥락들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어떤 이론들은 개념 사용의 기준들(criteria)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몇몇 지점은 언어적 구별들로 강화된다. (하트는 어떤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being obliged)’와 그것을 ‘할 의무를 지는 상태(being obligated)’ 사이에, 그리고 어떤 일을 ‘대체로(as a rule)’ 하는 것과 ‘규칙을 가지고 있는 것(having a rule)’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정도가 전부다. 언어철학자들에게 있었던 이론 구성에 대한 적대감은 없다. 법체계(legal system)가 ‘가족 유사성(family-resemblance)’ 개념이라거나 그와 비슷한 것이라는 시사도 없다. 하트는 심지어 어떤 것이 법체계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들(necessary and sufficient conditions)까지 정식화한다! 그는 이 문제나 법리학의 어떤 중심 문제도 단어들의 의미에 호소함으로써 접근하지 않는다. 하트는 언어적 접근의 무용함을 거듭 경고한다.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질문자에게 ‘법’과 ‘법체계’라는 단어들의 사용을 지배하는 기존 관행들을 상기시킴으로써 답하려는 것은,” 그가 말하듯, “‘쓸모없다’”(5). 더 넓은 법 개념과 더 좁은 법 개념 사이에서 선택하려면 의미론(semantics)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이 쟁점을 언어 사용의 적절성(proprieties)에 관한 문제로 본다면 우리는 이 쟁점과 충분히 씨름할 수 없다”(209). 법리학에 관한 책이 아니라 법리학의 방법론(methodology of jurisprudence)에 관한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경고들을 여기서 또한 드러나는 언어철학의 다른 측면들에 대한 우호성과 조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트는 어떤 것의 방법론에 관한 책도 쓰고 있지 않다.

물론 이 책의 제목을 포함하여 책의 수사(rhetoric)가 언어철학의 색채를 띤다는 점은 부인될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사상사가(historian of ideas)는 문체(style)를 넘어 실질(substance)을 보아야 한다. 한 철학자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무엇을 하고 있다고 말했는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정치학이 과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논고(Treatise)탐구(Enquiry) 어느 쪽에서도 단 하나의 실험이나 증명도 보고되지 않았다.) 현재 철학의 수사적 스타일들은 하트의 스타일과 다르고, 그 차이는 하트 자신의 스타일이 벤담(Bentham)의 스타일과 달랐던 것만큼이나 크다. 이것들이 실제 기법상의 차이들을 얼마나 표시하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ii) 명료화(clarification)와 비판(criticism)

이 책은 하트(Hart)가 ‘일반적이고 기술적인(general and descriptive)’ 것이라고 부르는 한 종류의 법이론(legal theory)을 옹호한다(239–40). 그가 뜻하는 바는 이것이 영국법(English law), 관습법(common law), 자본주의적 법(capitalist law)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법 그 자체(as such) 에 관한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으로 중립적(morally neutral)이며 정당화적 목적들(justificatory aims)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 법의 일반적 설명 안에 나타나는 형식들과 구조들(forms and structures)을 도덕적 또는 그 밖의 근거들에서 정당화하거나 권장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낙관적으로 덧붙인다. “이것들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법에 대한 유익한 도덕적 비판을 위한 중요한 예비조건(preliminary)이라고 나는 생각한다”(240).

이 책이 정당화적 목적들을 결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어쩌면 도덕적 편향이 의도치 않게 스며들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근거는 어떤 기술(description)이든 기술되는 것에 관한 사실들의 목록 이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관찰들(observations)은 이론 적재적(theory-laden)이고, 관찰들로부터 만들어진 기술들은 가치 적재적(value-laden)이다. 따라서 기술적 법철학(descriptive legal philosophy)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성급하다. 사실 진술(statement of fact)은 참 또는 거짓으로 평가될 수 있다. 기술은 보통 참 또는 거짓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유익하거나 무익한지, 밝혀 주거나 밝혀 주지 못하는지 등으로 생각된다. 어떤 대상이나 사태(state of affairs)에 대해서도 가능한 기술들은 무한히 많다. 각각에 관한 사실들이 무한히 많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대한 실제의 기술은 그것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목록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로 중요하거나, 두드러지거나(salient), 관련 있거나, 흥미롭다고 여겨지는 사실들의 선별(selection)과 배열(arrangement)이다. 모든 기술은 어떤 가치들을 전제하거나, 어떤 가치들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그 기술을 제시하는 사람이 그러한 가치들을 지지한다(endorses)는 것, 또는 그것들이 도덕적 가치들(moral values)이라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사건관리시스템(case-management system)을 ‘비효율적(inefficient)’이라고 기술하는 것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 시스템의 특정 특징들을 주의의 대상으로 선별한다. 그러나 선별의 이유는 화자 자신이 효율성(efficiency)을 가치 있다고, 하물며 가장 가치 있다고 또는 도덕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필요가 없다. 그는 청중이 그것을 두드러진 것으로 생각한다고 보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거나, 그 사건관리시스템을 사용하는 판사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기 때문에 거기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가능성들은 많다.

비판자들이 하트의 기술적 기획 안으로 도덕이 스며든다고 감지한다고 여기는 한 지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된 논증을 허구적 사회발전사(fictional history of social development)를 통해 도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91–9). 우리는 ‘원시적(primitive)’ 사회에서 시작한다. 그 사회에서는 해야 할 일에 관한 합의(consensus)를 통해 사회질서(social order)가 달성된다. 사회 변화와 함께 이러한 장치들은 불확실성에 취약하고, 정태적이며, 비효율적이 된다. 이차적 규칙들(secondary rules)을 갖춘 법의 출현은 이러한 ‘결함들(defects)’을 치유하고, 그리하여 ‘발전된(developed)’, ‘복잡한(complex)’ 사회에서는 승인 규칙들(rules of recognition), 변경 규칙들(rules of change), 재판 규칙들(rules of adjudication)의 사용을 통해 우리가 확실성(certainty), 역동성(dynamism), 효율성(efficiency)을 얻는 만큼 사정이 더 나아진다. 여기서 비판자들이 달려든다46. 하트는 법의 이점들(merits)에 대해 중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어떻게 법이 ‘결함들’을 치유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는 어떻게 전(前)법적(pre-legal) 사회들을 ‘원시적’이라고 부르면서도 그것들을 암묵적으로 비난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문맥에서 ‘원시적(primitive)’은 분명 단순하다는 뜻이다. 어리석거나 야만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단순한 사회들이 법을 가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이 법을 발명할 만큼 충분히 문명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회들이 법을 필요로 하지(need) 않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이나 사회 안에는 법을 요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많은 사회들이 법 없이도 잘 지내 왔다(91). 국제 영역에서 볼 수 있듯, 고도로 체계화된 규칙 체계들은 “필수품이 아니라 사치품”이다(235). 예컨대 사회들이 작고, 안정적이며, 사회적으로 또 이념적으로 결속되어 있을 때, 그 안에서 작동하는 단순한 사회질서의 형식들은 실제로 잘 작동한다(91). 그러나 “이와 다른 어떤 조건들에서도 그러한 단순한 사회통제의 형식은 결함 있는 것으로 판명될 수밖에 없고, 서로 다른 방식들로 보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92). 먼저 주목할 점은, 문제의 결함(defect)이 도덕적 악덕(moral vice)이 아니라 사회통제 메커니즘들 안의 기능적 결손(functional deficit)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유감스러워할 일인지는 이 메커니즘들이 선(good)을 지향하는지 악(evil)을 지향하는지에 달려 있다. 더 효율적인 사회통제는 나쁜 것일 수 있다. 둘째, 결함은 단순한 사회 안에 있다기보다 통치 양식들과 사회적 복잡성 사이의 부조응(mis-match) 안에 있다. 결함은 낯선 사람들의 큰 사회를 친구들의 작은 사회인 것처럼 통치하려는 데 있다. 예컨대 일부 현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 정치이론들의 실수가 그렇다. 여기에는 우리가 법 없는 단순한 사회와 법 있는 복잡한 사회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후자를 선호해야 한다는 시사가 없다.

따라서 이 논변은 하트가 추구하는 종류의 중립성을 포기한 것으로 비난될 수 없다. 물론 하트는 이차적 규칙들의 출현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그것을 법에 관해 두드러지고 중요한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다. 사실 위에서 보았듯 그는 그것을 도덕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편향은 오히려 그의 논변 안에 어떤 종류의 근대주의적 승리주의(modernist triumphalism)를 읽어 넣는 사람들에게 더 자주 있다. 그들은 어떤 사회가 법체계를 결여한다면 근대성의 성취들 중 하나를 결여한다고 상정한다. ‘원시적’ 사회들을 문명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협하고 깎아내리는 일이므로, 후건부정법(modus tollens)에 의해 그 사회들은 법체계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들을 법체계들로서(as) 인정하지 못하는 모든 법리학은 근대법 또는 서구법에 유리하게 편향되어 있다. 그 논변의 형식은 놀랍다. 그것은 모든 사회가 법을 가져야 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하여, 모든 사회가 실제로 법을 가진다는 추론을 끌어낸다. 그 추론은 명백히 타당하지 않다(invalid). 또한 그것은 하트가 거부하는 전제에 기대고 있다. 그는 법에 대한 열광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법을 사방에서 찾아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유사한 고려들은 제10장에서 국제법(international law)은 체계(system)가 아니라 규칙들의 집합(set of rules)이며, 그런 방식에서 단순한 사회질서와 조금 닮았다는 하트의 주장(claim)에도 적용된다. 국제법학자들은 분개한다. 하트가 국제법에 ‘낮은 점수’를 주며, 국제법을 그것이 지닌 특별한 것이라기보다 ‘추방자(outcast)’처럼 취급한다고 보는 것이다47.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의 지위를 너무 걱정한 나머지, 이 장의 주된 부담이 국제법을 방어하는(defend) 데 있다는 점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곧 국제법이 중앙 주권자나 강제적 관할권을 결여하므로 법일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국제법을 방어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하트는 국제법이 그다지 체계화되어 있지는 않다고 의심한다. 그는 그 분야에서 전반적 승인 규칙(overall rule of recognition)과 같은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다른 이차적 규칙들이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어떤 실체(entity)가 국가(state)인지 또는 조약(treaty)을 채택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규칙들이 있을 수 있다. 두드러지는 점은, 국제법학자들이 국제질서 자체에 관해 쓸 때에는(그것에 대한 법리학 이론들에 관해 쓸 때가 아니라) 그 중심 규칙들 중 많은 것이 불균등한 실효성(effectiveness)을 가진다는 점, 일부 중요한 규범들에 대한 검사 기준들(tests)이 심각하게 미확정적이라는 점, 재판기관들이 특수 목적 재판소들로 파편화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국제법의 많은 영역들이 여전히 열망적(aspirational)이라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의 체계화(systematization)는 어쨌든 정도의 문제이며, 국제법이 1961년보다 지금 더 체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을 수 있다48. 그것이 이미 국내 법체계들(domestic legal systems)에서 발견되는 것과 대등하다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다. 이 점을 지적하면서 하트가 국제법을 비난하거나 베스트팔렌식 국가주의(Westphalian statism)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국제법이 어떤 방식들에서는 국내법과 같고, 어떤 방식들에서는 그렇지 않은지를 이해하려 한다.

이 모든 것이 『법의 개념(The Concept of Law)』이 정치도덕(political morality)에 관한 견해들에 의해 틀지어진 책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하트식 밀적 자유주의(Millian liberalism)나 그의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가 많이 담겨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도덕적 견해들 중 또 다른 하나, 곧 가치 다원주의(value pluralism)의 뚜렷한 흔적들은 있다. 그의 친구 아이제이아 벌린(Isaiah Berlin)처럼49, 하트는 좋은 것(what is good)이 환원 불가능하게 복수적이며, 세계는 진정한 선들(genuine goods)이 자주 충돌하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한쪽에서의 정당화된 이득(justified gain)조차 다른 한쪽을 희생시켜 얻어질 수 있다. 따라서 하트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나 복지경제학(welfare economics)에서 보는 유형의 환원적 일원론(reductive monism), 곧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실제로 단 하나뿐이라는 입장에 반대한다. 또한 그는 다양한 가치들을 허용하지만 그것들이 (적절히 해석되면) 결코 충돌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비환원적 입장(nonreductive position)에도 반대한다50. 하트는 “법들(laws) 및 법들의 운영(administration of laws)은 서로 다른 종류들의 탁월성들(excellences)을 가질 수도 있고 결여할 수도 있다”(157)고 말하며, 정의(justice)조차 그러한 탁월성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의 가치 다원주의는 법적 추론에 관한 언급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사법적 결정(judicial decision)은, 특히 높은 헌법적 중요성을 지닌 사안들에서, 종종 도덕적 가치들 사이의 선택을 포함하며, 어떤 단일한 두드러진 도덕 원칙의 적용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204). 이것은 사법적 추론(judicial reasoning)에 중대한 함의를 가질 것이다. “그러한 원칙들의 복수성이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사법적] 결정이 유일하게 올바르다(uniquely correct)는 것은 입증될(demonstrated) 수 없다…”(205).

6. 의의 (THE POINT)

하트(Hart)의 노선에 따른 하나의 일반 법리학(general jurisprudence)이 성공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왜 애를 써야 하는가? 이 책의 관념들(ideas)과 씨름하는 일은 현대 법철학의 방대한 문헌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료가 되어 버렸다. 이 책은 더 이른 철학 저작들에 대한 유익한 논의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로 다른(other) 법리학 책들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법리학 책을 읽어야 한다는 관념에는 하트 자신보다 더 날카로운 비판자가 없다. 『법의 개념(The Concept of Law)』에는 학술 주석들(scholarly notes)이 많지 않고, 그것들도 책 뒤로 물러나 있으며, 읽는다면 나중에 읽으라는 시사와 함께 배치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배열이, 법이론에 관한 책은 일차적으로 다른 책들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배우는 책이라는 믿음을 약화시키기를 바란다. 이 믿음이 쓰는 이들에게 유지되는 한 그 분야에서는 거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읽는 이들에게 유지되는 한 그 분야의 교육적 가치는 매우 작게 남을 수밖에 없다(vii).

그러나 진보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일이 가치 있으려면, 그 분야에서의 진보 자체가 가치 있어야 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하트식 분석적 법철학(analytic legal philosophy)은 비특정적 가치(non-specific value)를 가진다. 그것은 면밀한 독해(close reading), 명료한 사고(clear thinking), 신중한 논변(careful argument)을 높이 평가하고 촉진한다. 이것들은 모두 유용한 기술들이며, 교육적 가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배우는 방법은 많고, 법리학 연구가 가장 빠르거나 쉬운 경로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일반 법리학(general jurisprudence)에 대한 충분히 적절한 변호(apology)는 법이 중요한 사회 제도(social institution)이며, 그러한 제도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장이나 가족의 본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이유들로 법의 본성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시장이나 가족보다 법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 입증되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법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법 관련 행태의 예측이나 법들(laws) 및 법제도들(legal institutions)의 개혁보다 추구해야 한다는 점도 입증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들 중 어느 것도 법리학(jurisprudence)의 독특한 가치(distinctive value)를 약화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삶과 법에 관한 지침을 바라며 법리학 책들을 읽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제공하기를 바라며 법리학 책들을 쓴다. (마키아벨리가 그랬던 이유로, 곧 군주의 귀를 붙잡기 위해 쓰는 사람들도 포함해서.) 그런 것이 당신의 야심이라면 일반 법리학(general jurisprudence)은 당신을 실망시킬 수 있다. 일종의 고급 amicus curiae 의견서(high-brow amicus curiae brief)로서 그것이 미친 영향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물론 소송 사건(court case)이 법리학적 테제들(jurisprudential theses)을 제기하거나 그것들에 의존할 수는 있다. 실제로 판사들이 법의 유효성(validity)과 실효성(efficacy) 사이의 관계, 벌칙들(penalties)과 조세들(taxes)의 차이, 심지어 법과 관습(custom)의 차이에 관해 견해를 표명하는 결정들이 있다. 그러나 법원들이 그러한 물음들을 다룰 때에는, 법철학(legal philosophy)이 존중할 의무가 없는 지역적 법교의적 제약들(local doctrinal constraints) 안에서 그것들에 답하려 한다. 우리에게는 관습적 사회질서들(customary social orders)과 법체계들(legal systems)을 구별할 좋은 이론적 근거들(grounds)이 있다. 그러나 특정 법체계는 원주민 관습(aboriginal custom)을 그 자체의 자격에서 하나의 법체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트의 이론을 반박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어업법(Fisheries Act)」이 포경(whaling)을 규율한다는 사실은 고래(whales)가 물고기(fish)가 아니라는 우리의 확신을 조금도 흔들지 않는다. (그것이 「어업법」에 무언가 잘못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법의 개념』은 영어권에서 정치철학(political philosophy)이 부흥하던 문턱에 서 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직후, 관심은 상당히 극적으로 가치의 문제들(problems of value)로 향했다. 다음 세대의 큰 책들은 정의(justice), 자유(liberty), 평등(equality) 같은 관념들(ideas)에 초점을 맞추었고, 법제도들(legal institutions)과 구조들(structures)에 대한 주의는 줄어들었다51. 하트의 책은 평가적 쟁점들(evaluative issues)을 곁눈질한다. 앞서 보았듯, 이 책은 정의에 관해 말할 것이 있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그것은 제도들과 구조들에 관한 책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리고 기술적 지향(descriptive orientation)에 머무르려는 꾸준한 결의 때문에, 이 책은 때때로 변론가(advocate)가 즐겨 쓰는 폄하어들을 끌어들인다. 그 이론은 ‘불모적(sterile)’이라거나 ‘지루하다(boring)’고 선언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알기 어렵다. 그 폄하어들은 지적 편협성을 드러내지만, 자기인식의 결여도 드러낸다. 법이 의심할 여지 없이(unquestionably) 흥미롭고, 다른 것들은 가능한 소송과의 관련성을 보여 줌으로써 흥미롭게 된다고 보는 것은 법률가의 자만이다. (이 관념은 진정으로(really) 흥미로운 물음이란 의뢰인이 그 답에 돈을 낼 만한 물음이라는 생각과 그리 멀지 않다.)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은 “판사들이 사건들을 어떻게 결정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법리학(jurisprudence)이 중요하다고 쓴다52. 훨씬 앞서 그는 이렇게 쓴 적도 있다. “일반적으로, 법원의 결정에 대한 좋은 이유란 무엇인가? 이것이 법리학의 그(the) 질문이다…”53. 하트는 가치 다원주의자(value pluralist)일 뿐 아니라 지적 다원주의자(intellectual pluralist)이기도 하다. 그는 최종 결론으로 달려가는 경주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제1장은 ‘지속되는 질문들(Persistent Questions)’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복수형이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법은 강제적 위협들(coercive threats)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법의 의무적 힘(obligatory force)은 무엇에 해당하며, 그것은 도덕적 의무(moral obligation)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사회적 규칙들(social rules)이란 무엇이며, 법은 어떤 방식으로 규칙들에 관한 것인가?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도 법리학의 그(the) 질문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그저 법리학의 질문들(questions)이다. 그것들은 결국 흥미로운 질문들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단순한 진실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이렇게 썼다. “나의 학구적 성향, 절제, 근면은 내 가족에게 법률직(the law)이 내게 적합한 직업이라는 관념(notion)을 갖게 했다. 그러나 나는 철학과 일반 학문의 추구를 제외한 모든 것에 극복할 수 없는 반감을 느꼈다…”54. 흄은 법률직(the law)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게 여겼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다른 이들에게는 반대 방향의 반감들이 있다. 그러나 지적 성향이 무엇이든, 누구나 볼 수 있어야 하는 점이 있다. 흄은 분명 보았다. ‘흥미롭다’는 것은 문제의 대상이 가진 성질이 아니라 그 대상과 한 사람 사이의 관계가 가진 성질이다. 하트의 법리학은 소송들과 관련되는 정도가 제한적일 수 있지만, 그 문제들의 내재적 중요성(intrinsic importance)을 보는 누구에게나, 또 더 큰 정치적 관심들을 가진 이들에게도 관심을 끌 만해야 한다. 법정 안에서는 당해 법(the law)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법(law)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하트가 상기시키듯, 작동 중인 법(law-in-action)의 대부분이 일어나는 법정 바깥에서는 법의 본성에 관한 질문들이 제자리를 얻는다. 통치 수단으로서의 법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그것의 이점들과 위험들은 무엇인가? 법의 지배(rule of law)를 왜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가? 우리는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디까지 그래야 하는가? 그리고 물론, 도대체 왜 법을 가져야 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묻게 되거나 더는 피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누구든, 답들을 찾기 위해 일반 법리학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트가 그 일을 이렇게 잘 시작해 두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극히 행운이다.

  1. 예컨대 John Searle, The Construction of Social Reality (Allen Lane, 1995); Neil MacCormick, Institutions of Law: An Essay in Legal Theory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참조. 

  2. Ian Hacking, The Social Construction of What?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비교 참조. 

  3. Cicero, De Re Republica III. xii. 33, tr. C. W. Keyes (Harvard University Press, Loeb Classical Library, 1943) 211. 

  4. 아마 John Finnis의 Natural Law and Natural Rights (2nd edn., Oxford University Press, 2011)가 이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5. Ronald Dworkin, Taking Rights Seriously (Harvard University Press, 1978), chap. 4; Ronald Dworkin, Law’s Empir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6), chaps. 2–3. 

  6. Hans Kelsen, Pure Theory of Law (Max Knight tr., 2nd ed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7) 193–205. 

  7. Ibid. 1. 

  8. 아래 292–3쪽 및 H. L. A. Hart, Essays in Jurisprudence and Philosophy (Oxford University Press, 1983)에 수록된 하트의 논문 「Kelsen Visited」와 「Kelsen’s Doctrine of the Unity of Law」 참조. 

  9. 괄호 안의 쪽수 참조는 모두 이 책을 가리킨다. 

  10. Michel Foucault, ‘Truth and Power’ in his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s, 1972–1977 (Colin Gordon ed., Vintage, 1980) 121. 

  11. Ronald Dworkin, Taking Rights Seriously (rev. edn., Harvard University Press, 1978) 48–58쪽; Joseph Raz, Practical Reason and Norms (2nd edn.,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49–58쪽 참조. 

  12. 이 논점에 관한 하트 논증의 다른 의문점들에 대해서는 Leslie Green, 「Positivism and Conventionalism」 (1999) 12 Canadian Journal of Law and Jurisprudence 35; Julie Dickson, 「Is the Rule of Recognition Really a Conventional Rule?」 (2007) 27 Oxford Journal of Legal Studies 373 참조. 

  13. 예컨대 Joseph Raz, Practical Reason and Norms; Frederick F. Schauer, Playing by the Rules: A Philosophical Examination of Rule-based Decision-making in Law and in 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Andrei Marmor, Social Conventions: From Language to Law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9); Scott J. Shapiro, Legality (Harvard University Press, 2011) 참조. 규칙(rules)과 기준(standards)의 구별은 Henry M. Hart and Albert Sacks, The Legal Process: Basic Problems in the Making and Application of Law (W. N. Eskridge, Jr. and P. P. Frickey eds., Foundation Press, 1994) 139–41쪽에서 제시된다. 

  14. 규칙(rules)과 원리(principles)의 구별은 Ronald Dworkin, Taking Rights Seriously 22–8쪽에서 제시된다. 

  15. 이 주제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Jeremy Waldron, Law and Disagreement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참조. 

  16. Ronald Dworkin, Law’s Empire 34. 

  17.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공무담당자들(officials)이 중요한지, 그리고 ‘공무담당자(official)’의 역할이 어떻게 성격 규정되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다루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말해, 하트(Hart)는 적어도 판사들(judges)과 입법자들(legislators)을 포함하려는 뜻을 지니며, 이때 ‘공무담당자(official)’는 법적 정의가 아니라 사회정치적(socio-political) 정의를 따른다. 

  18. 4 U.S.C. § 8 (h). 

  19. H. L. A. Hart, ‘Positivism and the Separation of Law and Morals’ (1958) 71 Harvard Law Review 593, at 601 n. 25. 

  20. John Gardner, 「Legal Positivism: 5½ Myths」, 그의 Law as a Leap of Faith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제2장; Leslie Green, 「Positivism and the Inseparability of Law and Morals」 (2008) 83 New York University Law Review 1035 참조. 

  21. Summa Theologica II-I, q. 90 a. 4. 

  22. 행위 지도의 기능에 대해서는 Lon L. Fuller, The Morality of Law (rev. edn., Yale University Press, 1969); 활동 조정의 기능에 대해서는 John Finnis, Natural Law And Natural Rights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정의 실현의 기능에 대해서는 Michael Moore, 「Law as a Functional Kind」, R. P. George 편, Natural Law Theory: Contemporary Essays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221; 강제 허용의 기능에 대해서는 Ronald Dworkin, Law’s Empire 93 참조. 

  23. 강제(coercion)를 허용한다는 것은, ‘현재 진행 중인 강제 행위에 대해 정당화(justification)를 제공한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정당화될 수 없는 강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보장한다’는 의미인가? 혹은 ‘정당화될 경우에만 사람들에게 강제를 가한다’는 의미인가? 

  24. Hans Kelsen, General Theory of Law and State (A. Wedberg tr., Harvard University Press, 1949) 20. 

  25. David Lyons는 「On Formal Justice」 (1973) 58 Cornell Law Review 833에서 그 명칭 아래 이를 비판한다. Matthew Kramer는 더 나은 명칭인 ‘constancy’ 아래 이를 옹호한다. Matthew Kramer, 「Justice as Constancy」 (1997) 16 Law and Philosophy 561 참조. 

  26. H. L. A. Hart, ‘Positivism and the Separation of Law and Morals’ 593, at 626. 

  27. John Gardner, 「The Virtue of Justice and the Character of Law」, 그의 Law as a Leap of Faith 제10장을 따른 것이다. 

  28. 하트는 자신의 입장을 ‘연성(soft) 실증주의’라고 부르지만, 이 입장이 법이 참조하는 모든 것을 법이 포함한다고 보기 때문에 ‘포괄적(inclusive) 실증주의’라는 명칭이 더 명료하다. 

  29. 이 은유는 Ronald Dworkin, Taking Rights Seriously 17쪽에서 처음 사용된다. 

  30. 이 이론은 W. J. Waluchow, Inclusive Legal Positivism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및 Jules Coleman, The Practice of Principle: In Defence of a Pragmatist Approach to Legal Theory (Oxford University Press, 2001)에서 옹호된다. Joseph Raz, Ethics in the Public Domain: Essays in the Morality of Law and Politics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제9장, 제10장 및 Scott Shapiro, 「On Hart’s Way Out」 (1998) 4 Legal Theory 469에서 비판된다. 

  31. 여기서 하트는 ‘도덕적 또는 관행적(moral or conventional)’이라는 표현으로, 오스틴(Austin)이 법적 권한에 대한 ‘실정적 도덕(positive morality)’의 비법적(non-legal) 제약이라 부른 것과, 다이시(Dicey)가 말한 헌법적 ‘관행(conventions)’를 모두 포괄하고자 한다. 

  32. 언제나 그렇듯, ‘통제됨(controlled)’이란 ‘완전히 통제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3. Hans Kelsen, Pure Theory of Law 350–1. 

  34. H. L. A. Hart, Essays in Jurisprudence and Philosophy 361. 

  35. Joseph Raz, The Morality of Freedom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chap. 2; Ethics in the Public Domain, chap. 10; and Between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On the Theory of Law and Practical Reas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chap. 5. 

  36. 이는 단지 그들이 이기적(selfish)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이거나, 자신이 이유(reason) 있다고 생각(think) 하는 행동이 아니라, 그들이 ‘객관적으로(objective)’ 이유가 있는 행위를 의미한다. 

  37. 게다가 이후의 한 논문에서 하트 자신도 이 입장의 몇 가지 핵심 개념을 수용한다. 참고: H. L. A. Hart, 「Commands and Authoritative Legal Reasons」, Essays on Bentham (Oxford University Press, 1982). 

  38. 토니 오노레(Tony Honoré)는 법이 제기하는 도덕적 주장(moral claims)을 통해 그러한 요청(invitation)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참고: 「The Necessary Connection between Law and Morality」, (2002) Oxford Journal of Legal Studies 22:489. 

  39. Joseph Raz, Between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제7장 참조. 

  40. David Sugarman, ‘Hart Interviewed: H. L. A. Hart in Conversation with David Sugarman’ (2005) 32 Journal of Law and Society 267, 291. 

  41. Hans Kelsen, General Theory of Law and State 178. 여기서 ‘규범적(normative)’이란 ‘규범(norms)과 관련된’이라는 뜻이지, ‘도덕적으로 평가적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42. 지표(index)를 구성하려는 몇몇 시도와 그 구성상의 문제에 대한 검토로는 Tom Ginsburg, 「Pitfalls of Measuring the Rule of Law」 (2011) 3 Hague Journal on the Rule of Law 269 참조. 

  43. 법리학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의 적극적인 옹호로는 Brian Leiter, Naturalizing Jurisprudence: Essays on American Legal Realism and Naturalism in Legal Philosophy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참조. 

  44. Richard Rorty 편, The Linguistic Turn: Recent Essays in Philosophical Metho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7) 참조. 

  45. 그리고 후기 비트겐슈타인(later Wittgenstein), 특히 그의 제자 프리드리히 바이스만(Friedrich Waismann)을 통해 수용된 견해도 참고할 수 있다. 하트와 그 당시 옥스퍼드 철학자들과의 개인적·지적 관계에 대한 통찰력 있는 논의는 니콜라 레이시(Nicola Lacey), A Life of H. L. A. Hart: The Nightmare and the Noble Dream (Oxford University Press, 2004)을 참조하라. 

  46. 수많은 비판적 포착자들 가운데 Stephen Guest, 「Two Strands in Hart’s Concept of Law」, Stephen Guest 편, Positivism Today (Dartmouth, 1996) 29 참조. 

  47. Ian Brownlie, ‘The Reality and Efficacy of International Law’ (1981) 52 British Yearbook of International Law 1, 7–8. 

  48. 일부 쟁점에 대한 검토로는 Samantha Besson and John Tasioulas 편, The Philosophy of International Law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1–13쪽의 편집자 서론 및 거기서 인용된 문헌들을 참조. 

  49. Isaiah Berlin, Four Essays on Liberty (Oxford University Press, 1969), and also his ‘On Value Pluralism’ (1998) New York Review of Books, vol. XLV No. 8. 

  50. 이 입장에 대한 가장 지속적인 옹호는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 Justice for Hedgehogs (Harvard University Press, 2011)을 보라. 

  51. 이 주제가 응용 도덕철학(applied moral philosophy)의 방향으로 지나치게 나아갔다는 제안은 제레미 월드론(Jeremy Waldron), 「Political Political Theory: An Oxford Inaugural Lecture」, http://ssrn.com/abstract=2060344에서 제시된다. 

  52. Ronald Dworkin, Law’s Empire 1. 

  53. Ronald Dworkin, ‘Does Law Have a Function? A Comment on the Two-Level Theory of Decision’ (1965) 74 Yale Law Journal 640. 

  54. David Hume, ‘My Own Life’ in his Essays, Moral, Political and Literary, E. F. Miller, ed. (Liberty Press,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