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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단락은 생각의 방이 아니라 추론의 장치다

학생들은 단락을 대개 분량 단위로 배운다. 문장을 몇 줄 모아 놓으면 단락이 되고, 단락 몇 개를 쌓으면 글이 된다고 느낀다. 그러나 좋은 논증문에서 단락은 단순한 쉼표가 아니다. 단락은 하나의 기능을 수행하는 추론 장치다.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으로 지지하고, 무엇을 예증하며, 어디로 나아가는지가 단락의 구조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1

이 장을 따로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앞 장들에서 우리는 논제와 쟁점을 세우는 법을 보았다. 그러나 논제를 세웠다고 곧바로 본론 전체를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생은 먼저 한 단락 안에서조차 주장과 이유와 사례를 구별해 쓰는 연습이 필요하다. 단락 훈련은 본론 전체 구조를 대체하지 않지만, 그 구조를 세우기 위한 가장 작은 입문 단위가 된다.

1. 왜 단락부터 훈련하는가

좋은 본론은 결국 여러 단락이 맞물려 만들어진다. 그런데 학생이 한 단락 안에서도 무엇이 주장이고 무엇이 이유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면, 본론 전체의 구조를 말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따라서 단락 훈련은 사소한 입문이 아니라, 논증적 글쓰기가 몸에 배기 시작하는 최초의 현장이다.

실패 장면

학생의 단락은 종종 이런 식으로 흐른다. 첫 문장에서 이미 결론을 말하고, 둘째 문장에서는 그 결론을 다른 말로 한 번 더 반복하고, 셋째 문장에서는 막연한 상식을 덧붙이고, 마지막 문장에서는 갑자기 더 큰 사회적 함의로 뛰어오른다. 얼핏 보면 문장은 많지만, 단락 안에서 어떤 문장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2. OREO의 유익한 소박함

강의에서 자주 제시하는 OREO 모델은 소박해 보이지만, 입문 단계에서는 놀라울 만큼 실전적이다.2

  • O: Opinion
  • R: Reason
  • E: Example or Evidence
  • O: Opinion Restated

여기서 한국어 독자가 특히 조심해야 할 지점이 첫 번째 O다. Opinion을 단순히 의견이라고 옮기면, 마치 가벼운 사견이나 취향 고백처럼 들리기 쉽다. 그러나 OREO에서 Opinion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이 단락이 실제로 옹호하려는 핵심 주장, 곧 단락 수준의 thesis statement에 더 가깝다.3

이 오해는 한국어의 일상적 용법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흔히 “의견을 말해 보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면 된다고 느낀다.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논증문 단락에서는 그 첫 문장이 뒤에 이어질 reason과 example 또는 evidence가 실제로 떠받칠 수 있는 주장이어야 한다. 단순히 “나는 이렇게 느낀다”는 식의 태도 표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차이는 영어 교육 현장에서도 자주 드러난다. 유아·초등 영어교육에서 opinion writing을 연습할 때, 원어민 교사나 첨삭 교사는 대개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라”는 뜻보다 “처음에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그 뒤에 이유와 사례로 그 입장을 지탱하라”는 뜻으로 opinion을 요구한다. 그런데 한국어의 의견 글쓰기라는 말만 받아들이면, 학생과 학부모는 이를 종종 생각이나 느낌을 자유롭게 적는 글 정도로 오해한다. 그 결과 영어권 첨삭에서 요구하는 바와 학습자가 실제로 이해하는 바 사이에 엇갈림이 생긴다.

그래서 OREO의 첫 문장을 쓸 때는 이렇게 자문하는 편이 좋다. “이 문장은 단지 내 입장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뒤에 나오는 이유와 사례가 실제로 지지할 수 있는 주장인가.” 이 질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단락은 처음부터 가벼운 소감문으로 미끄러질 위험이 있다.

이 모형이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다.

  • 적어도 주장과 근거를 분리해서 쓰게 만든다.
  • 사례가 논증을 보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익히게 한다.

학생이 처음으로 논증 단락을 써 볼 때, 이 네 요소만 제대로 들어가도 글은 이미 상당한 질서를 얻는다.

3. 단락의 기능을 분리하라

좋은 단락에서는 각 문장이 비슷한 일을 하지 않는다.

  • 첫 문장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 다음 문장은 왜 그런가를 말하는가
  • 이어지는 문장은 어떤 예나 증거를 주는가
  • 마지막 문장은 그 단락이 글 전체에서 갖는 의미를 회수하는가

이 기능 구분이 없으면, 학생의 단락은 흔히 같은 주장만 다른 말로 반복하는 패턴에 빠진다.

고쳐 읽기

정부 규제는 필요하다. 정부 규제는 꼭 있어야 한다. 정부 규제가 없으면 문제가 생긴다. 같은 단락은 입장을 반복할 뿐 이유를 세우지 못한다. 반면 기후 변화는 전형적인 부정적 외부효과이므로, 자발적 선택만으로는 사회적 비용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 예컨대 개별 기업은 배출의 이익을 사적으로 취하면서도 비용은 널리 분산시킨다. 따라서 일정한 형태의 공적 규제가 필요하다.와 같이 쓰면 단락 안의 기능이 분명해진다.

4. 사례는 이유를 대신하지 않는다

OREO에서 학생들이 가장 자주 실수하는 부분은 E다. 개인적 신념, 막연한 상식, 감상적 일화가 자꾸 사례 자리에 들어온다. 그러나 사례는 이유를 비추어 주는 장치여야지, 이유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4

예를 들어 다음 두 문장을 비교해 보라.

  •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느낀다.
  •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전유는 단순한 물리적 개입이 아니라 가치 창출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문장은 느낌이다. 두 번째 문장은 이유다. 사례는 언제나 이유 뒤에 와야 하며, 그 이유를 독자가 더 잘 이해하게 해야 한다.

5. 한 단락, 한 기능

장문을 쓰다 보면 학생은 한 단락에 너무 많은 일을 시키고 싶어진다. 그러나 좋은 단락은 대개 한 가지 중심 기능만 수행한다.5

  • 어떤 전제를 옹호하는 단락
  • 예상 반론을 제시하는 단락
  • 그 반론을 재반박하는 단락
  • 앞선 논의를 종합하는 단락

하나의 단락 안에 논제, 요약, 반론, 감상, 결론을 모두 넣으면, 글은 풍성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너진다.

6. 단락 훈련은 어디까지 유용한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OREO나 단락 템플릿은 입문용 발판으로는 유익하지만, 그것만으로 본론 전체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단락 훈련은 작은 논증 단위를 익히게 해 주지만, 여러 단락이 어떻게 하나의 결론을 위해 누적적으로 작동하는지까지는 보장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이 장 다음에 본론 전체를 다루는 장이 온다. 이 장이 한 단락 안의 질서를 세운다면, 다음 장은 여러 단락이 모여 하나의 논증을 이루는 질서를 다룬다. 그러므로 OREO는 폐기해야 할 도구가 아니라, 제자리를 찾아야 할 도구다.

단락 작성을 위한 소형 템플릿

다음 틀을 여러 주제에 반복 적용해 볼 수 있다.

이 글이 다루는 난제는 … 이다.
나는 … 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 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
따라서 … 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 틀은 영원한 형식이 아니지만, 초고를 세우는 발판으로는 대단히 유용하다.

장 끝 연습

하나의 단락을 써 보라. 주제는 다음 중 하나를 고른다.

  • 공유지의 비극
  • 알고리즘과 자율성
  • 기후 변화와 정부 규제

조건은 네 가지다.

  • 첫 문장에 난제 또는 논제를 둘 것
  • 둘째 또는 셋째 문장에 이유를 둘 것
  • 중간에 구체적 사례를 넣을 것
  • 마지막 문장에서 단락의 결론을 회수할 것
  1. 이 장은 단락을 기능 단위로 보는 전통적 작문 교육과 논증 교육을 계승한다. 다만 문체론이나 문학적 산문 이론에서는 단락을 추론 장치만이 아니라 리듬, 시점, 정동의 단위로도 본다. 따라서 여기서의 정의는 논증문에서의 단락으로 한정해서 읽는 편이 적절하다. 

  2. OREO는 영미권 초중등 의견쓰기 교육에서 널리 쓰이는 구조다. 학계의 정교한 단락 이론이라기보다 교수용 프레임이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 좋다. 따라서 이 장은 OREO를 보편적 규범이라기보다 입문용 발판으로 제시한다. 

  3. 철학사에서 그리스어 doxa(δόξα)는 흔히 opinion, belief, judgment 등으로 옮겨진다. 플라톤의 맥락에서는 종종 epistēmē(ἐπιστήμη)와 대비되어, 확고한 앎보다는 믿음이나 판단의 차원을 가리킨다. 다만 doxa = 가벼운 사견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예컨대 Theaetetus에서는 alēthēs doxa(ἀληθὴς δόξα)가 true judgment 또는 true opinion으로 논의되고, 후대 회의주의 전통에서도 doxa는 단순한 취향이라기보다 어떤 사태를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판단 태도를 뜻한다. 따라서 이 장에서 OREO의 Opinion을 설명할 때도, 일상적 의견보다는 단락 수준의 주장 또는 판단 문장에 가깝게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관련 설명은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Plato on Knowledge in the TheaetetusAncient Skepticism 항목을 참고했다. 

  4. 이 문장은 개인 경험을 다소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 일화가 항상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경계는 경험 자체가 아니라, 경험이 근거와 연결되지 않은 채 독립적 증명처럼 사용되는 경우를 겨눈다. 

  5. 한 단락, 한 기능은 매우 유익한 규율이지만 절대 규칙은 아니다. 예컨대 종합 단락이나 전환 단락은 두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초고 단계의 과잉 혼합을 제어하려는 교수적 원칙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