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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논제, 명제, 그리고 문장의 엄정함
논증적 글쓰기의 첫 번째 법칙은 단순하다. 주제만으로는 글이 시작되지 않는다. 반드시 논제가 있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참과 거짓의 평가가 가능한 명제 형식의 논제가 있어야 한다.1 학생이 흔히 “나는 인공지능에 대해 쓰겠다”, “낙태에 대해 쓰겠다”, “창의성에 대해 쓰겠다”고 말할 때, 그는 아직 글의 출발점에 서 있지 않다. 무엇을 증명할지 정하지 않은 채 큰 화제를 붙드는 태도는, 큰 주제를 다룰수록 지적으로 보인다는 오래된 보상 구조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어 글쓰기 현장에서는 이 기초 구별이 용어 단계에서부터 쉽게 흐려진다. 주제와 논제가 뒤섞이고, 논제는 다시 막연한 의견이나 생각과 혼동된다.2 이 혼동이 생기면 학생은 주제를 잡아 놓고도 논제를 세웠다고 믿고, 문장을 하나 써 놓고도 명제를 제시했다고 착각하기 쉽다.
1. 주제와 논제의 차이
- 주제: 논의의 영역
- 논제: 필자가 옹호하려는 주장
여기에 영어 표현을 겹쳐 두면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3
- 주제:
topic - 논제: 옹호하려는 중심 주장, 흔히
thesis에 가까운 것 - 명제:
proposition - 문장:
sentence
예를 들어 기후 변화의 원인은 주제다. 반면 기후 변화는 주로 인간 활동에 의해 가속화된다는 논제다. 전자는 문을 열고, 후자는 방 안으로 들어간다.
topic만으로는 아직 무엇을 옹호할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강의실에서 내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학생들이 한국어 논제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thesis statement에 가까운 진술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4
학생 글에서 가장 흔한 오류는 주제를 논제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은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판정하지 않는다. 주제가 넓을수록 필자는 안전하다고 느끼지만, 독자는 그만큼 길을 잃는다.
실패 장면
학생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저는 AI와 교육에 대해 쓰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만으로는 아직 아무 논증도 시작되지 않는다. AI가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지, 그 영향이 바람직한지 해로운지, 어떤 조건 아래 허용되거나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전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면, 글은 곧바로 정보의 창고가 되고 만다.
고쳐 읽기
“AI와 교육에 대해 쓰겠다”는 말은
topic을 고른 것이다. “생성형 AI의 무분별한 과제 사용은 학습자의 설명 책임을 약화시킨다”는 식의 문장이 나와야 비로소 논제 진술문, 곧thesis statement에 가까운 것이 된다. 그리고 그 문장이 논증의 출발점이 되려면, 그 안에 담긴 핵심 내용이 참과 거짓의 평가가 가능한proposition이어야 한다.
2. 명제란 무엇인가
명제는 참이나 거짓이 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의문문, 감탄문, 막연한 감상은 대개 명제가 아니다. 논제는 독자를 설득해야 하므로, 먼저 그 대상이 판단 가능한 내용이어야 한다.5
다음 두 문장을 비교해 보자.
행복이란 무엇일까?경제적 안정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첫 문장은 물음을 여는 데 유용할 수 있으나, 그 자체로는 논제가 아니다. 두 번째 문장은 옳거나 그를 수 있으므로 논제가 될 수 있다.
3. 좋은 논제의 조건
구체성
정의는 중요하다 같은 문장은 지나치게 넓다. 좋은 논제는 독자가 무엇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알게 한다.
논쟁 가능성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는 정의일 뿐 논증적 긴장을 낳지 않는다. 누구도 진지하게 다투지 않는 명제는 논제라기보다 사전 항목에 가깝다.6
용어의 명료성
중요하다, 나쁘다, 적절하다 같은 표현은 맥락을 주지 않으면 흐릿하다. 어떤 기준에서, 누구에게, 어떤 결과와 비교하여 중요한지를 밝혀야 한다.
범위의 절제
전칭과 특칭을 가리지 못하면 글은 쉽게 과장된다.
- 나쁜 예:
사람은 이기적이다. - 더 나은 예:
위기 상황에서 상당수의 개인은 협력보다 자기 보존을 우선하는 경향을 보인다.
후자는 검토 가능하고 반론 가능하다. 그러므로 더 학술적이다.
왜 문제인가
주제를 크게 잡는 습관은 여러 장면에서 유리해 보인다. 면접에서는 관심사가 넓어 보이고, 발표에서는 문제의식이 커 보이며, 시험장에서는 많이 아는 사람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논증문에서 이런 넓이는 대개 힘이 아니라 안개가 된다. 논제가 엄정하지 않으면 어떤 전제를 입증해야 하는지, 어떤 objection이 들어올 수 있는지, 결론이 어디까지인지가 모두 흐려진다.
4. 논제를 정확히 세우면 왜 논증이 쉬워지는가
정확한 논제는 곧 논증의 방향을 제한한다. 그것은 글쓰기에서 제약이 아니라 축복이다. 필자가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순간, 사실 그는 아무것도 분명히 말하지 못하게 된다. 좋은 논제는 우리가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도 함께 결정해 준다.7
예컨대 알고리즘은 위험하다는 막연하다. 그러나 플랫폼 알고리즘은 정보 배열의 조건을 비가시적으로 설계함으로써 시민 자율성에 구조적으로 개입한다는 논제는 곧바로 다음을 요구한다.
-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
- 자율성 개념
- 구조적 개입의 의미
- 경쟁 이론과의 대비
논제가 정확할수록 필요한 전제 역시 선명해진다.
5. 문장을 고치는 일은 사유를 고치는 일이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자주 체감하는 놀라운 사실 하나는, 문장을 고치면 생각도 고쳐진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수사적 표현을 다듬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개념의 경계를 다시 긋는 일이다.
다음과 같이 고쳐 보자.
플랫폼은 사람들을 조종한다.플랫폼은 콘텐츠 배열 기준을 통해 사용자의 주의 분포를 사전에 조정한다.
두 번째 문장이 더 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엄밀함은 종종 길이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길이는 안개가 아니라 해명이어야 한다.8
장 끝 연습
아래의 주제를 각각 명료한 논제로 바꾸어 보라.
- 인공지능과 교육
- 낙태와 권리
- 기후 변화와 정부 개입
- 표현의 자유와 플랫폼 규제
조건은 셋이다.
- 참과 거짓을 판정할 수 있을 것
- 용어가 모호하지 않을 것
- 반론이 가능할 것
추가로 다음 물음에도 답해 보라.
- 내가 지금 적은 것은 넓은 화제(
topic)인가, 아니면 실제로 옹호할 논제 진술문(thesis statement)인가. - 이 논제 진술문은 참거짓을 가릴 수 있는
proposition을 담고 있는가. - 나는 단지 문장을 길게 쓴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논제를 세운 것인가.
-
이 장의 정의는 철학적 논증문과 사회과학 논문에 특히 잘 맞는다. 그러나 인문학 전반의 모든 글이 단일한 명제 형식을 강하게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문학비평, 문화연구, 에세이 전통에서는 문제제기형 서술이나 해석적 배열 자체가 논변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
-
영어 표현을 접하면 혼동은 더 커진다.
topic,thesis,proposition,sentence는 서로 다른 층위의 말인데, 현장에서는 이것들이 한꺼번에 뭉개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어논제를 언제나 영어thesis의 번역으로 고정하는 일이 아니라, 적어도 논증문 교육의 맥락에서는무엇에 대해 쓰는가와무엇을 옹호하는가를 분리해 이해하는 일이다. ↩ -
다만 이것은 일대일 번역표라기보다, 서로 다른 기능을 구분해 보기 위한 보조선 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
-
thesis는 대개 하나의sentence로 제시되지만, 그 핵심은 문장의 길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proposition의 명료성에 있다. ↩ -
명제성에 대한 이 강조는 툴민의
claim중심 모델과도 통한다. 다만 툴민은 실제 논증에서 데이터, 보증, 한정어, 반박 가능성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고 말하므로, 명제 형식만으로 논증의 충분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 -
“누구도 진지하게 다투지 않는”이라는 표현은 교육적 과장을 포함한다. 실제 연구에서는 정의 자체가 쟁점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인간,성별,예술,폭력같은 개념 정의는 곧바로 규범적·정치적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 -
이 대목은 논제의 협소화가 학술 글쓰기에서 생산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문제중심 글쓰기나 탐색적 초고 단계에서는 처음부터 좁은 논제가 아니라 넓은 질문을 붙든 채 써 내려가는 방식도 유효하다. 따라서 이 명제는 초고 전 단계보다는 제출용 논증문 단계에 더 적합하다. ↩
-
“엄밀함은 종종 길이를 요구한다”는 말은 압축과 간결의 전통과 충돌할 수 있다.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장황함의 옹호가 아니라, 과도한 축약 때문에 개념 관계가 생략되는 문제를 경계하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