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돌봄 윤리 (Care Ethics)
돌봄 윤리는 여성주의 심리학자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 1982)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그녀의 통찰로 촉발된 다양한 학문적 논의 속에서 발전하였다. 돌봄 윤리 이론가들은 도덕적 추론 방식 중 돌봄, 관계, 책임을 우선시하는 방식이 여성에게 특징적인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하며, 이를 정의와 권리를 중심으로 한 남성 중심적 추론 방식과 대조시켜 왔다. (다만 이러한 이론에서 정의와 돌봄의 구체적인 젠더화된 구도 자체가 도전받아 온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러한 차이가 성별 그 자체보다도 오히려 사회적·정치적으로 주변화된 집단들이 동원하는 도덕 추론 양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여성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Cortese 1990 참조.)
돌봄 윤리 이론가들은 전통적인 도덕 원칙에 대해 불신을 보이며, 사랑(love), 돌봄(care), 책임(responsibility) 같은 가치들이 맥락적 미묘함과 관계적 유대를 포착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이들은 원칙 중심의 윤리 틀이 이러한 요소들을 간과한다고 본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과 그 외 다른 입장에서도, 돌봄만을 기반으로 한 윤리학이 여성주의 생명윤리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충분한지에 대해 회의가 제기되었다. 이 논쟁을 처음으로 다룬 논문집 Women and Moral Theory는, 주요한 돌봄 윤리 이론가들과 함께, 성차 기반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이 정치 및 법적 문제와 어떤 연관을 가지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이론가들의 글을 병치하였다(Kittay and Meyers 1987). 비평가들은 젠더화된 사회구조를 고려할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길리건의 관점에 내재된 남성적 ‘목소리’와 여성주의적 ‘목소리’의 이분법에는 이의를 제기한다.
수전 셔윈(Susan Sherwin)은 자신의 저서 No Longer Patient: Feminist Ethics and Health Care (1992)에서, 돌봄 윤리에 대한 비판을 확장하며, 돌봄 윤리 옹호자들이 여성의 성격을 남성과 본질적으로 다르게 간주해온 전통에 지나치게 쉽게 적응해 왔고, 무엇보다 이 윤리에는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배와 억압의 패턴을 제대로 설명하고 이를 뒤흔들 수 있는 명시적 정치 관점이 부족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유사한 우려는 Bartky(1990), H. L. Nelson(1992), Kuhse(1995), Gould(1998) 등의 여성주의 이론가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에 응답하고자, 알리사 카르세(Alisa Carse)와 힐데 린데만 넬슨(Hilde Lindemann Nelson)은 1996년 논문 “Rehabilitating Care”에서, 비평가들이 제기한 주요 문제들에 돌봄 윤리 내부의 자원이 응답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돌봄 윤리의 확장을 시도했다. 이후로도 돌봄 윤리를 옹호하는 여성주의자들은 이 이론의 핵심 요소들을 정의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보다 포괄적인 도덕 틀로 통합하려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Noddings 2002; Ruddick 1989; Held 1993, 1995, 2006). 이 과정에서 돌봄 윤리는 대인관계의 문제를 넘어서, 보다 일반화된 방식으로 다뤄야 할 사회적·정치적 이슈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키타이(Kittay)와 다른 이론가들은 의존성(dependency)의 보편적 측면에 주목하며, 첨단 기술 의료에 비해 환자 돌봄, 노인 간호, 장애인 지원 같은 필수적인 일상적 돌봄이 낮은 지위로 평가받는 현실을 비판한다(Kittay 1999; Kittay and Feder 2002; Eckenwiler 2014). 돌봄의 가치는 고품질 의료에 필수적이지만, 의료 행위 중 돌봄 요소는 종종 ‘잡무(housekeeping issues)’로 폄하되며, 학문적 관심도 낮고 보상도 부족하다. 반면 ‘위기 상황(crisis issues)’은 이론적으로 주목받고 실제로도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장기적인 돌봄이 필요한 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기에, 이후 연구들은 이 문제에 지속적으로 주목해 왔다. 제니퍼 파크스(Jennifer Parks)의 No Place Like Home: Feminist Ethics and Home Health Care (2003)와 로절린드 래드(Rosalind Ladd) 외의 논문집 Ethical Issues in Home Health Care (2002)는, 노인과 장애인의 복지에 결정적인 문제들을 다루며, 최근 여성주의 이론에서 정의와 돌봄의 관계를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에 따른 돌봄 수요는 더욱 증가했으며, 이에 따라 IJFAB은 고령화와 장기 돌봄을 주제로 한 특집호(2013년 제6권 2호)를 발간하여 Lanoix, Kittay, Tong, Martha Holstein 등의 주요 논문을 포함하였다(모두 2013년).
돌봄에 관한 관련 연구는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Socializing Care라는 논문집은 조안 트론토(Joan Tronto, 1993)의 요구—즉, 다원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이 함께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자질 속에 돌봄의 실천을 통합한 정치이론의 필요성—을 이어받아 구성되었다(Hamington and Miller 2006). 이 책의 필자들은 돌봄의 사적 영역화(privatization)에 내재된 권력 불균형과, 공적 돌봄 윤리(public ethics of care)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돌봄 이론을 간호 윤리에 적용하기도 하였으며(Kuhse 1997), 루스 그루언하우트(Ruth Groenhout, 2004)와 수잔 도즈(Susan Dodds, 2007)는 돌봄 관점과 덕 윤리(virtue theory)를 결합한 여성주의 생명윤리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전체성(holistic nature), 사회적 맥락, 감정적 반응의 중요성, 그리고 실존적 서사를 떠난 행위 판단의 불가능성을 강조하였다. 그루언하우트는 새로운 생식 기술 분야 등 여러 사례를 분석하며, 돌봄 윤리를 도입할 경우, 특정 환자의 욕구뿐 아니라 그 의료 개입이 초래할 전체적 비용과 편익, 다른 의료 수요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아동과 여성의 신체 기능이 상품화될 위험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스컬리(Scully, 2010a)는 장애인의 맥락에서 돌봄을 고찰하면서, 장애인이 받는 돌봄이 아니라, 그들이 비장애인을 위해 수행하는 숨겨진 돌봄 노동에 주목하였다. 최근에는 여성주의 생명윤리학자들이 돌봄, 의존성, 독립성, 자율성이라는 중심 개념들 간의 복잡한 연결을 분석하는 데 주력해 왔다. 특히 생명윤리에서 ‘취약성(vulnerability)’ 개념에 주목하는 연구 흐름이 두드러진다(Luna 2006, 2009; Rogers, Mackenzie and Dodds 2012). IJFAB은 취약성을 주제로 한 특집호(2012년 제5권 2호)를 통해, 글로벌 윤리, 약물 주사, 임신 중인 연구 대상자의 특별한 취약성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이후 Catriona Mackenzie, Rogers, Dodds가 공동 편집한 논문집(2014)은 이 주제를 더 깊이 탐구하였다.